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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간 아침 열어준 동아, 하루라도 안보면 잠 안 올 정도”

입력 | 2018-01-26 03:00:00

[동아일보 30000호]‘93세 열혈독자’ 光州 김기회 씨




올해 93세인 김기회 씨가 24일 광주 서구 자신의 집 작은방 의자에 앉아 이날 치 동아일보를 읽고 있다. 김 씨가 매일 아침 배달된 동아일보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 건 올해로 63년이 됐다. 옆에 놓인 두툼한 책들은 동아일보에 실린 사설을 모은 ‘사설선집’. 김 씨는 요즘도 옛 동아일보 사설을 찾아 읽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전국이 ‘냉동실’로 변한 24일. 광주 날씨도 다르지 않았다. 아침 기온이 영하 11.2도까지 내려갔다. 광주에서는 흔치 않은 추위다. 하지만 김기회 씨(93)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전 8시 김 씨는 자신의 아파트(광주 서구 양동) 현관문을 열었다. 이어 문 앞에 놓인 동아일보를 집어 들고 작은방으로 향했다. 김 씨의 신문 읽기는 남다르다. 가장 먼저 겹쳐 있는 신문을 한 장 한 장 나눈다. 그러고는 첫 번째 장의 4개 면을 꼼꼼히 읽는다. 그래서 1면을 가장 먼저 읽고 두 번째로 2면, 세 번째로 마지막 면 사설을 읽는다. 이어 같은 방식으로 3, 4면을 차례로 본다. 신문 전체를 읽는 데 매번 한 시간 이상 걸린다. 김 씨는 “김순덕 논설주간과 송평인 논설위원의 열렬한 팬이다. 두 사람의 칼럼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말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김 씨는 대화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50년 전 함께 공직 생활을 한 동료 이름까지 줄줄 외울 정도다. 비결은 하루도 바뀌지 않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그리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신문이다.

김 씨가 동아일보 구독을 시작한 건 1955년 가을이다. 공직생활 7년 차이던 그는 당시 전남 진도군 내무과장이었다. 지금이야 다리를 건너가지만 그때 진도는 섬이었다. 광주에서 진도를 가려면 울돌목 근처 나루터인 벽파진에서 배를 탔다. 서울에서 진도를 가려면 꼬박 이틀이 걸릴 때다. 그런 진도에서 세상 소식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신문이었다.

김 씨는 신문을 통해 넓은 안목을 키우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1등 신문’ 동아일보를 선택했다. 이후 63년 동안 동아일보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폭우가 내려 신문을 받아보지 못한 날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 일과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는 찜찜한 기분 탓이었다. 일요일이 서운한 이유도 비슷하다. 신문이 쉬는 날이라 어쩔 수 없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아일보는 김 씨 인생의 동반자였다.

전남 고흥 출신인 김 씨는 1948년 전남도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전남 영암군수와 담양군수, 광주시 부시장, 고흥·신안 교육장을 거쳐 1991년에 퇴임했다. 1993∼1995년 광주광역시 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오랜 기간 흔들림 없이 공직자로 일할 수 있던 배경에도 동아일보가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를 열독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등 다양한 가치를 생각하게 됐다. 비록 말단 직원일 때도 언제든 주민과 준법, 공정은 물론이고 국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공직자가 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김 씨는 공직생활 중 의미 있는 발자취를 여럿 남겼다. 1966년 전남도 교육위원회 문정과장 재임 당시 그는 국회가 도서벽지교육진흥법을 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열악한 섬이나 농촌마을의 교육여건 개선을 지원하는 법률이다. 김 씨는 “당시 일부 섬과 농촌 학교들은 시설이 너무 낡아 비가 줄줄 샐 정도였지만 보수조차 못 했다. 그때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법을 만들어 농어촌 교육에 보탬이 됐다”고 회고했다.

1969년 광주시 부시장 재임 때 금남로 확장공사를 하며 은행나무를 심었다. 도심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대량 식재된 것은 처음이었다. 또 1972년 담양군수로 재직할 때 처음으로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조성했다. 현재 담양 메타세쿼이아 숲길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고 있다.

김 씨는 6·25전쟁을 시작으로 4·19혁명, 5·16군사정변,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집회까지 역경의 한국 현대사를 몸소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단발성 뉴스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기사 한 건으로 언론을 평가하며 일희일비한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에 대해 갖고 있는 미안함도 전했다. 1970년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다. 국민들이 백지광고로 동아일보를 응원하는 걸 봤다. 공직자 신분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탓에 따로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인지 1977년과 1984년 발행된 동아일보 사설 모음(선)집을 그는 지금도 소중히 읽고 있다.

김 씨는 앞으로도 동아일보가 좌고우면하지 않는 사회의 목탁이 되길 바랐다. 또 다양한 사회현상을 일회성으로 다루지 말고 후속 결과까지 챙겨줘 궁금증을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지령 3만 호까지 지켜온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창간정신을 계속 이어가길 바라며 동아일보에 덕담을 건넸다.

“동아일보의 바탕은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사명감과 책임을 다해주기를 바랍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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