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지령(紙齡) 3만 호가 나온 오늘, 4만 호의 아침을 생각해본다. 2050년 6월쯤이 될 것이다. 그날, 대한민국과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 30여 년 사이 세상이 얼마나 엄청난 정치 경제 사회적 격변을 겪는지 보려면 2만 호가 나온 날로 눈을 돌려보자.
1986년 10월 1일자 사설이다. “정치에 몰입한 사람들의 눈이 충혈되고 목소리가 턱없이 높은 것은 예나 비슷하지만 그것을 보고 듣는 국민 쪽은 한결 다르다”며 정치는 그대로지만, 국민의 눈높이가 달라졌다고 썼다. 전두환 정권의 독재 아래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그날,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이런 열망이 이듬해 6월 항쟁으로 이어져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 ‘87년 체제’를 열어젖힐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 30여 년 사이 동서 냉전구도는 붕괴했고, 미국과 슈퍼파워 자리를 두고 자웅(雌雄)을 겨뤘던 소련이란 나라는 지구상에서 소멸됐다. 한국에서는 7명의 새로운 대통령이 나왔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정보혁명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국권(國權)이 없던 일제 암흑기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민족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을 3대 사시(社是)로 내세우며 창간한 청년 벤처였다. 창립자이자 발기인 대표였던 인촌 김성수(당시 29세)를 비롯해 창간의 주축은 모두 신학문을 배운 20대였다. 창간사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신(新)시대의 서광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며 ‘저 도도한 흐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새로운 시대가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는, 청년다운 패기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펜으로 일제와 맞선 동아일보는 그 후로도 숱한 신산(辛酸)을 겪었다. 4번의 정간에 이은 1940년의 강제 폐간, 6·25 참화 속의 휴간을 거쳐 지령 1만 호를 발행한 것이 1955년 8월 19일이었다. 당시에도 1면 사설을 통해 “자유언론을 아름답게 개화(開花)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의 개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며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꾸짖었다. 아울러 ‘진실 자유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박해도 감수하며 영원히 자유언론의 선봉으로 싸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렇다. 진실 자유 정의는 지령 1만 호 때나 3만 호인 오늘이나, 4만 호 때인 2050년에도 동아일보가 걸어야 할 길이다.
4만 호 때는 독자 여러분의 아들딸들이 자신의 아들딸의 미래를 기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러분이 아들딸들을 사랑과 걱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아들딸, 그리고 그들의 아들딸이 살아갈 대한민국을 지금보다 더 나은 나라로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청년들이 희망의 문을 활짝 열고 미래로 전진하도록 온 힘을 쏟을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압축적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성과와 목적 달성을 위해 때론 절차와 다양성은 생략되거나 무시됐다. 아직도 좌·우와 보수·진보가 갈려 말을 섞는 것조차 기피하는 듯한 풍조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미성숙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언론마저도 진영이 나뉘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전달하는, 극단적인 신뢰의 위기다.
가짜뉴스가 판칠수록 동아일보는 팩트(사실)의 엄정함을 추구해 가치 판단의 최종적 준거(準據)가 되기 위해 매진할 것이다. 이를 통해 무너진 신뢰의 사회적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앞장서려 한다. 창간 때나 2년 뒤 창간 100년을 맞을 때나 우리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때론 설렘으로, 때론 두려움으로 독자 여러분의 질정(質正)과 편달(鞭撻)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