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0호]되돌아본 ‘나와 동아일보’ 19인
“내일 아침 동아일보∼. 내일 아침 동아일보∼. 목이 터져라 소릴 질러대며 신문을 팔았다.”(방열 농구협회장)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 1면의 대문짝만 한 기사로 종철이의 희생은 역사가 됐다.”(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 씨)
○ 인연은 달라도 ‘내 인생의 동반자’
그는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통해 △진실을 알기는 몹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느 경우에나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익혔으며 △말과 글은 알기 쉬워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술회했다. “많이 일했고, 많이 마셨다. 나의 내면을 형성한 소중한 기간이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1974년 고려대 재학 시절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맞서 직접 손으로 쓴 대자보를 도서관에 붙여 항의하고 지원 모금활동을 벌여 동아일보에 전달했다.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도 받았으나 지금도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영화 ‘1987’로 재조명된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 씨는 1월 19일자에 실린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 1면 톱기사를 보는 순간 벌벌 떨렸던 손의 감각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김동연 부총리는 “동아일보를 보면 그리운 두 얼굴이 떠오른다”며 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다. 서른셋에 생을 마감한 김 부총리의 아버지는 한때 고향 충북 음성에서 장사를 하면서 동아일보 보급소장 격의 일을 했고, 서울에서 사업을 할 때는 1년에 두세 차례 자신을 앞세워 동아일보를 방문해 이재민 등을 위한 구호품을 냈다고 한다. 또 동아일보 인턴기자를 했던 큰아들 덕환 군이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10년 전의 인턴기자 그 모습 그대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했다.
방열 농구협회장은 1950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아일보를 팔던 기억을 생생히 전했다. “갓 받아든 신문을 왼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운다. 신문은 따끈따끈했다. 바람을 가르듯 달리기 시작한다. 가슴이 뛴다. 잘 팔릴 땐 하루 두 탕을 뛴다. 후문으로 달려가 또 한 차례 신문 배당을 받아 팔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동아일보를 교과서 삼아 언문과 한문을 익혔다는 그는 이때 익힌 글솜씨로 ‘방열의 눈’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쓰기도 했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은 2011년 1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총격을 받은 석해균 선장과 지난해 11월 판문점에서 총격을 받으며 남으로 넘어온 북한 병사 오청성을 치료할 때 치열한 취재정신을 보여준 동아일보와 채널A 기자들과의 만남을 소개했다. “아무도 모르는 경로와 방법을 동원해 경비망을 뚫고, 한 장면의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보여준 기자로서의 치열한 ‘진정성’에 놀랐다.”
○ 문화 체육계, 등용문이자 도약의 디딤돌
사시(社是) 중 ‘문화주의를 제창함’이 있는 것처럼 동아일보는 선도적으로 문화사업을 벌여 많은 문화체육계 인사들에게 등용문이나 도약하는 무대를 마련했다.
안숙선 명창은 1989년부터 동아일보와 국립극장이 함께 주최한 ‘완창 판소리’ 무대 공연이 소리꾼으로서 스타가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허영만 화백은 동아일보 지면에 만화 ‘식객’과 ‘꼴’을 각각 1438회와 542회 게재하며 일간지에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가 됐다. ‘식객’은 2002년 9월 2일부터 2008년 12월 18일까지, ‘꼴’은 2008년 1월 1일 시작해 2010년 3월 31일까지 연재했다. 겹치는 시기를 빼도 7년이 훌쩍 넘는다.
1995년 중편소설이 당선된 전경린 씨는 당시 중편소설을 완성했으나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 있었던 신문사는 동아일보밖에 없었다고 했다.
소프라노 신영옥 씨는 1978년 10월 제8회 동아음악콩쿠르 본선 및 대상 선발대회에 참가해 3등을 했지만 그 때문에 이듬해 미국 뉴욕 줄리아드음악원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주인공인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은 1991년 3월 제62회 동아마라톤 3위 입상이 마라톤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이를 계기로 그해 7월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 대표로 참가해 우승했고 8월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을 넘어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그는 “동아마라톤 3위가 없었다면 오늘의 황영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은퇴 경기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선발전으로 열린 제67회 동아마라톤이었다.
발레리나 김주원 씨는 어엿한 발레리나로서 가장 가슴이 뛰었던 첫 무대를 꼽으라고 하면 1995년 동아무용콩쿠르 무대를 주저 없이 꼽는다고 했다. 자신의 이력 첫 줄에는 동아무용콩쿠르 금상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국내 언론사 주최 바둑대회로는 처음 1956년 창설된 ‘국수전(國手戰)’에서 총 16번(1976∼1986년은 연속 10연패) 우승한 조훈현 국수(국회의원)는 지금도 ‘조 의원’보다 ‘조 국수’라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 애정 어린 응원
“동아일보, 아∼ 그대는 정녕 오늘의 내가 있도록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도 내가 체험했던 감명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소통과 공감을 이어가길 기원하면서 이 자리를 빌려 3만 호 발행을 축하하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방열 협회장은 글을 보내며 이런 추신을 달았다.
이낙연 총리는 “동아일보 3만 호에는 내 청춘의 흔적도 서려 있다”며 분발을 당부했고 홍준표 대표는 “대학 시절 동아일보는 1등 신문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숙선 명창은 “지난 수십 년간 국악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수많은 무대를 만들어 주어 모두 배고프고 힘들던 시절에 국악인들은 동아일보에 커다란 신세를 졌다”고 회고하며 지령 3만 호를 축하했다. 소프라노 신영옥 씨도 “언론사 중 동아일보만큼 한국 클래식 음악에 큰 공헌을 하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더욱 힘써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박능후 장관은 “항상 올곧고 날카롭게 세상을 비판하는 언론관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작가 전경린 씨는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와 유신 독재정권에서 정간과 폐간 등 시련을 겪어온 역사를 통해 그 자세와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며 “더욱 탄탄한 걸음으로 쉼 없이 나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