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고려의 성종(재위 981∼997년)은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국가 체계를 정비하면서 서경(평양)에 학교와 도서관을 겸한 수서원(修書院)을 세웠고, 개경(개성)에는 왕실도서관 역할을 하는 비서원(秘書院)을 두었다. 이 가운데 990년 설치한 수서원에서는 ‘모든 서생들로 하여금 사적(史籍)을 베껴 써서 간직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도서 열람과 함께 복사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본에는 왕실도서관으로 궁내청 서릉부(書陵部)가 있다. ‘서릉’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서 및 문서 자료와 함께 능묘도 관리하는 부서다. 서릉부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6∼1909년 규장각에서 빌려간 도서 77종 1028책이 소장돼 있었다. 빌렸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빼앗은 것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11종 90책이 반환됐고, 2011년 조선왕실의궤와 함께 나머지 66종 938책이 반환됐다.
1891년 건립된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의 서재이자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이용된 왕실도서관이었다. 2016년 조선시대 관련 도서 1000여 권과 왕실 자료 영인본 350여 권, 한국 문학 번역본 230여 권을 비치한 도서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도서관이 왕실과 지배 계층의 독점에서 모든 시민의 것으로 바뀌는 과정은 지식의 국민주권 시대가 열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 국가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 현재를 보려면 시장,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