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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정원수]오동나무 관(棺)의 저주

입력 | 2018-01-30 03:00:00


정원수 정치부 차장

약 5년 전인 2013년 3월 하순. 보수 정권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군인 출신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취임한 직후였다. 기자는 국정원 고위 간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 일본으로 출국하려다 인천공항에서 발길을 돌린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단연 화제였다.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에 솔깃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 최장수 정보기관장이 망명을 하려고 하나.”

4년 1개월 동안 재임하다 퇴임 사흘 만에 출국을 시도한 게 다소 생뚱맞긴 해도 ‘망명’이라니, 잘 납득이 안 됐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 때 6년 3개월간 중정부장을 지내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 전 부장과 비교하다니…. 원 전 원장은 왕복 항공편까지 공개하며 세간의 망명설을 부인했다. 일본에서 5박 6일 머물다 귀국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에서 먼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예사롭지 않았다.

그 후 머지않아 원 전 원장은 검찰 수사라는 늪에서 허우적댔다. 개인 비리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첫 구속→만기출소→법정구속→보석→구속’이라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최근에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으로 추가 수사를 받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 따로 없다. 그런데 그의 비극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더 놀랍다. “수감 중인 게 차라리 다행이다. 서울 시내를 활보했다면 직원들부터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원 전 원장을 향한 국정원 직원들의 저주에 가까운 분노는 어디서 오는 걸까. 직원 상당수가 ‘진실로 믿고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원 전 원장 부부가 무척 아끼던 애완견이 어느 날 죽었다. 장례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직원들은 정성껏 준비했다. 그런데 불호령이 떨어졌고, 한 직원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지방으로 좌천됐다. 알고 보니 오동나무 관을 쓰지 않았던 게 주된 이유였다. 오동나무는 사람 장례용으로도 최고급 재료다. 좌천된 직원은 지방 숙소 앞에 키우던 강아지가 짖을 때마다 원 전 원장의 애완견이 떠올랐고, 분을 삭이지 못해 애꿎은 숙소 앞 강아지를 발로 걷어찼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듣고 기자는 어이가 없어서 국정원 관계자 여러 명에게 진위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진실에 가깝다”였다.

이는 국회 정보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이 최근 폭로한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원 전 원장의 패악질에 가까운 인사로 많은 직원이 고통을 당했고, 발병해 숨진 케이스도 있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5명 이내”라고 했다. ‘케이스’ 중에는 공교롭게도 직원들이 애완견을 돌보느라 시간을 허비한 얘기도 있다. 그 뒤 원 전 원장의 부인이 김 의원의 폭로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자 김 의원은 “모든 의혹은 사실”이라고 되받아쳤다. 김 의원은 국정원 출신으로 인사 분야에서만 20년 동안 근무했다.

과도한 정치 개입과 대북 정보라인의 붕괴, 특활비 상납, 거기에 개인비리까지 원 전 원장 시절 국정원은 가히 ‘눈길 위에서 가속페달을 밟듯’ 미끄러졌다. 그 대가는 “(정보와는 무관한) 서울시 공무원 출신 원 전 원장 재임 시절 국정원이 완전히 망가졌다”(이종찬 초대 국정원장)는 혹평들이다.

파산 선고를 받고, 수술대에 오른 국정원의 앞날은 오리무중이다. 아이로니컬하지만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병호 전 원장이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 된 이유를 설명한 기고문 중 일부분을 소개한다. “마법이나 비법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보기관 운영의 기본에 충실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 정보 운영의 원칙과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했을 뿐이다.” 이 전 원장과 모사드 관련 책을 공동 번역한 문재인 정부의 서동구 국정원 1차장만이라도 이 격언을 제대로 실천했으면 한다.

정원수 정치부 차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