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善山)에 사는 최씨(崔氏)의 처가 가난해 먹고살 길이 없자 술장사를 했다.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이 오더니 “나는 김해(金海) 아무 고을에 사는 사람이오. 오백금의 재물을 이곳에 옮겨와 보관하려 하는데 맡길 사람이 없소. 지금 주모를 보니 매우 청렴하고 정직한 것 같으니 이 돈을 맡겼다가 가을에 찾아가겠소”라고 했다. 주모가 극구 사양했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돈을 받아 보관했다. 주모는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그 돈에는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이 돼도 여인은 오지 않았다. 그다음 가을에도, 또 그다음 가을에도 여인은 오지 않았다.
장복추(張福樞·1815∼1900) 선생의 ‘사미헌집(四未軒集)’ 권6 ‘척유록(摭幽錄)’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의 숨겨진 행적을 뽑아 세상에 전하는 글이 ‘척유록’인데, 여기서는 가난한 주모가 주인공입니다. 처음 보는 여인이 나타나 억지로 돈을 맡기니 황당한 일입니다. 게다가 몇 년이 지나도록 찾으러 오지도 않으니 이젠 욕심이 생길 법도 합니다.
집안 식구들이 그 돈을 쓰자고 졸라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좋은 전답을 사서 경작을 하고는 해마다 생산량의 반을 나눠 저축했다. 5, 6년이 지나 쌀이 수천 석에 이르자 주모는 아들을 시켜 지난날 여인이 말했던 고을로 가서 그녀를 찾아보게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다. 또 사방으로 경내와 이웃 가까운 고을까지 찾아보았으나 끝내 여인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욕심낸 게 아니라 돈을 불려서 나누자는 뜻이었군요. 정직하고 선량한 백성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낸 셈입니다. 그런데 정작 여인은 자취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돈은 하늘이 정직한 주모에게 선물로 주신 걸까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선생은 주모의 정직한 행동을 예찬하십니다. “남의 재물을 받고서 한 푼도 손대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미 전답을 사고서 생산량의 절반을 나누어 불려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주인을 찾으려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受人之財而一不犯用爲難. 旣買田而分半以殖爲難. 又不遠千里, 搜覓爲尤難).”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많은 양심의 시험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