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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불꽃 튀기다 덴 대법원장

입력 | 2018-01-31 03:00:00

원세훈 상고심 의혹 놓고 대법관 13명 전원으로부터 고립된 김명수 대법원장
대법원 신뢰 걸린 문제… 얼버무리고 갈 일 아냐
의혹을 사실로 증명하든가… 못하면 본인이 책임져야




송평인 논설위원

최근 임명된 민유숙 대법관에 대해 현재 법원장으로 있는 분이 고등법원 부장판사였을 때 한 얘기가 기억난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민 대법관보다 기수가 아래인 김소영 대법관이 임명된 직후였다. 그는 “법관은 판결문 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판결문 쓰는 능력은 민유숙이 위다. 민유숙이 먼저 대법관을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승태 이전의 어느 전직 대법원장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더니 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대법관의 능력은 판결문을 쓰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없고 기획·조정력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법관은 그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정책총괄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민 대법관은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적이 없다. 대법원장을 지낸 분과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눈높이가 달랐다고밖에 할 수 없다.

‘재판관은 재판을 잘할 수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재판밖에 할 줄 몰라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모든 법관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인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대법원장에게라면 타당할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법원행정처에 근무한 적이 없다. 재판만 주로 한 법관은 순수해서 사법행정도 공정하게 잘할 것인가. 칸트의 말처럼 때로는 순수한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얼마 전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는 판사 블랙리스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관련 각계 동향 보고’라는 문건을 공개해 어느 신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판결 빌미로 청와대와 뒷거래한 양승태 대법원’이란 의혹을 던졌다.

이것은 의혹으로 남겨놓고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전화를 받을 수 있다. 그 자리는 그런 자리다. 대통령민정수석은 청와대의 변호사 격이다. 그의 조속한 상고심 진행 요구는 선거법 위반 사건의 경우 2심 판결로부터 3개월 내에 끝내야 한다는 법률에 비춰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다. 다만 전화 때문에 대법원이 합의체로 넘길 이유가 없었는데 합의체로 넘겼거나 대법관들이 자기 의사에 반해 선거법 무죄취지 파기환송에 동의했다면 그런 대법원을 믿고 최종심을 맡길 수 없다.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마땅하다.

추가조사위 발표에 대해 대법관 13명 전원은 즉각 “이 사건은 소부(제3부)의 합의를 거친 결과 증거법칙을 비롯한 법령 위반의 문제가 지적됐고, 사회적·정치적 중요성까지 아울러 고려해 합의체에 회부됐다”며 “관여 대법관들은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합의체 판결은 과반만 찬성해도 되는데 전원 일치 판결이었다. 의혹 제기 자체가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대법관 성명으로 부족하다면 김 대법원장이 직접 당시 재판에 관여한 대법관을 일일이 면담해 진상을 파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제3부에 속한 사건 주심은 퇴임했다. 그를 조사하면 사건이 합의체로 넘어간 과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한 대법관들도 최소한 두 명 있었다고 한다. 진실이 따로 있다면 그들이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이 있다고 한들 대법관들이 순순히 얘기하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의 반박을 할 거면 확인도 못할 의혹을 왜 던졌는지 먼저 답해야 한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가조사의 길을 연 것은 김 대법원장 자신이다. 의혹이 의혹으로 남는 것만으로도 대법원에 대한 신뢰는 훼손돼 그가 져야 할 책임이 크다. “재판이 재판 외의 일로 영향을 받는다고 오해받을 만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의혹을 증명하든가 증명하지 못하면 대법원장이 물러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판사들에 대한 동향 조사는 사찰과는 거리가 멀지만 과한 측면이 있다. 대부분 공개된 정보를 수집했지만 사적으로 알음알음 수집한 정보도 섞여 있다. 불필요할 정도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것이 양승태 대법원이 관료화한 증거일 것이다. 법원행정처 축소 등 김 대법원장이 하고 싶어 하는 개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대법원장이 애송이 ‘판사님’들에 휩쓸려 사소한 것에 불꽃을 튀기다 대법원을 다 태워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