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는 지난달 열린 ‘CES 2018’에서 차세대 자율주행 전기차 ‘e팔레트 콘셉트’를 선보였다. 이 차는 다양한 형태로 활용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자동차 회사의 브랜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도요타 제공
석동빈 기자
스스로를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지닌 카 가이스(Car guys)’로 칭한 루츠는 안전하고 멋지고 잘 달리는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 고객을 만족시키면 수익은 저절로 따라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는 근시안적인 재무 전문가들로 인해 망해가던 GM을 자신의 카 가이스 경영철학에 따라 회생시키는 과정을 회고록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BMW, 오펠 등 자동차 회사에서 50여 년간 다양한 업무를 수행한 루츠는 누구보다 자동차산업에 깊은 애정과 뛰어난 통찰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인 ‘오토모티브 뉴스’에 자동차산업에 대한 암울한 칼럼을 기고했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내연기관 자동차 제국의 부흥을 이끌어온 업계 ‘어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충격이 컸다.
칼럼 제목은 ‘좋은 시절이여 안녕(Kiss the good times goodbye)’이다. 그는 “20년 뒤면 자율주행차와 자동차 공유가 산업 전반을 뒤덮으며 전통적인 자동차의 시대는 끝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고성능 자동차를 만들던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 회사의 충격은 더 클 것으로 예상했다.
자율주행차가 기차의 객차처럼 모듈화돼서 우버나 리프트 같은 공유업체에 대량 납품되는 때가 오면 브랜드의 의미는 크게 퇴색되고 이동용 자율주행 모듈 납품업체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이점은 자율주행차의 비율이 20%를 넘어서는 시점으로 예상했다. 자동차 사고의 원인이 99.9% 인간이 운전하는 차에 집중된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때부터 급속히 모듈형 자율주행차 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8’에는 이미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도요타가 선보인 차세대 자율주행 전기차 ‘e팔레트 콘셉트’는 사실상 자동차의 모습이 아니라 이동식 박스형 모듈이다. e팔레트는 자가용, 공유 택시, 화물운송, 이동식 매장, 소형 사무실 등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형식의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채울 때면 루츠의 말처럼 자동차 브랜드의 가치는 사실 무의미해진다. 그는 대부분의 도로에서 인간의 운전이 금지되고 기존 자동차들은 서킷이나 한정된 공간에서만 탈 수 있는 놀이기구로 전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자동차산업의 패권은 누가 가져갈까. 현재의 진행상태라면 정보기술(IT) 기업과 인터넷 유통 기업, 공유서비스 기업 등이 나눠 가질 가능성이 높다. 삼성, 구글, 애플, 아마존, 우버, 리프트 같은 회사들이다. 자동차 분야에 대한 이 회사들의 투자금액은 지금까지 100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자동차 회사들이 마냥 넋을 놓고 있지는 않다. 인공지능이나 자동차 공유서비스 업체와 연결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적극적인 투자나 지분 공유를 통해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자동차 회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미래의 청사진이 불투명한 원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동차 회사의 보수적인 조직구조와 자동차 생산 및 시장의 주도권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카 가이스의 고집 때문이다. 이번에는 빈 카운터스가 아니라 카 가이스 때문에 자동차 회사가 위기를 벗어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루츠의 예언대로 20년 뒤 모듈형 자율주행차의 세상이 오면 기존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차 판매를 통해서는 수익을 올리기 힘들어진다. 그 대신 자율주행차와 연계된 쇼핑몰, 미디어, 공유서비스, 스마트시티 건설 참여 등 종합 스마트솔루션 회사로 거듭나야 생존이 가능하다.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돈을 버는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율주행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점유해 수익을 올리려면 이제는 카 가이들이 바뀌어야 할 때다.
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