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4> 있으나마나 워라밸 제도
4회 ‘칼퇴의 반전’은 미스터리 웹툰 ‘금요일(禁曜日)’로 유명한 배진수 작가가 사내 칼퇴근 제도 탓에 퇴근 후 카페로 자리를 옮겨 업무를 본 회사원 박민기(가명)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1 “자, 이제부터 오후 6시면 사무실 불을 다 끌 겁니다. 일찍 퇴근하세요. 하하하!”
화장품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민기(가명·31) 씨는 지난해 ‘위풍당당’했던 사장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드디어 ‘저녁이 있는 삶’이 오는 걸까.
한두 명씩 사무실을 빠져나오는데 문 앞에서 사장님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배웅했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며 귓속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사장님, 직원 수를 두 배로 늘리면 모를까, 6시 퇴근은 불가능합니다. 업무 현실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요.’ 먼저 카페에 도착한 동료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
오후 7시 ‘카페 야근’에 한계가 왔다. 다른 손님 눈치가 보였고 집중도 안 됐다. 식당을 찾아 국밥을 먹은 뒤 ‘사무실 수복 작전’에 들어갔다. 선발대가 어두컴컴한 사무실로 향했다. 공포영화처럼 사장님이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사무실 불은 다시 환하게 켜졌다. 웃프게도(웃기고 슬프게도) 우리가 들어온 뒤 2개 팀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결국 ‘일괄소등제’인지 뭔지는 두세 달 만에 흐지부지됐다. 오히려 그때 이후로 야근은 더 자연스러워지고 공고화된 느낌이다.
#2 대기업에 다니는 이현경(가명·29·여) 씨는 ‘워라밸’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사는 지난해 ‘오후 7시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며 PC오프제 도입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이 씨는 “지난주에도 나흘 야근했다”고 말했다. “컴퓨터가 꺼지는데 어떻게 야근을 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씨는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답답해했다.
이 회사에선 오후 7시에 컴퓨터가 바로 꺼지지 않는다. 오후 6시 55분에 ‘종료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라는 알림창이 뜬다. 오후 7시가 되면 화면이 꺼지지만 그렇다고 컴퓨터 자체가 꺼지는 건 아니어서 마우스를 움직이면 다시 화면이 켜진다.
#3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지선(가명·31·여) 씨는 지난해 말 회사의 ‘통 큰 약속’에 애사심이 싹텄다. 사장님은 “우리도 워라밸을 실천하자”며 전 직원 해외여행을 약속했다. 하지만 일정이 결정된 뒤 환호성은 수군거림으로 바뀌었다.
회사 단체행사인데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을 끼고 일정을 잡은 것이다. 직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주말에는 아이를 봐야 하는데….” “왜 휴일에 반강제로 단체여행을 가야 하나.” 여행지도 상대적으로 비용이 싼 일본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녀온 해외여행 직후 직원들은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가 해외여행 기간 중 평일인 목, 금요일을 사전 동의도 없이 일괄적으로 연차휴가로 처리한 것이다.
“사장님, 허울뿐인 워라밸은 사양합니다.”
▼ ‘묻지마 워라밸’ 공감 못얻고 역효과 불러… 업무별 효율성 높이는 법 찾아야 ▼
삼성, 롯데, 신세계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PC오프(OFF)제, 유연근무제 등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제도를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기업들이 워라밸을 내세운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 개인의 삶과 행복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퇴사율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 많은 기업이 직원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6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7.7%(2016년 기준)에 달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과거 업무 방식으로는 인재 육성에 한계가 있어 변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문화나 노동시장이 변하지 않으면 워라밸 열풍이 사라질 수 있다. 포스코는 2014년 퇴근 소등제를 시행했지만 곧 폐지됐다. 업무 상황과 특성이 다른데도 일괄적으로 퇴근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란 사내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작정 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조직 내 구성원의 근무 행태, 회의, 의사결정 방식, 하루 일과를 점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스마트 리디자인(smart redesign)’을 통해 근로자는 워라밸이 되고, 회사는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정태영 부회장 “회식에 끌려가는 분들께…” ▼
페이스북에 동아일보 시리즈 링크… 워라밸 기획, 포털 조회수 160만건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저녁도 회식‘(본보 2월 1일자 A8면)의 동아일보 기사 링크를 걸어 놓고 쓴 글이다. 정 부회장은 본보 기사를 소개하며 “직원들이 집에 들어가기 싫은 상사의 도우미도 아니고, 부서 단합이라면 1년에 몇 번이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팔로어 수만 10만 명에 이르는 정 부회장은 재계에서 혁신경영의 리더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현대카드는 지난해 초등학생 이하 자녀가 있는 임직원은 오전 7∼10시 원하는 시간에 출근하도록 ‘출퇴근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본보가 지난달 30일에 시작한 연중 기획 시리즈 ‘워라밸을 찾아서’는 3회 만에 동아닷컴과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서 조회 수 160만 건에 이르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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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경 whatsup@donga.com·김윤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