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5> ‘쉼표’가 없는 삶
매달 반복되는 팀장의 ‘단톡(단체 카카오톡)방’ 공지다. 몇 번이나 숨을 골라도 오르는 혈압은 어쩔 수 없다. ‘넵!’ 하고 답을 한 뒤 금요일 연차 신청을 올린다. 기분 좋아야 할 연차 신청 때마다 울화가 치미는 건 ‘거짓 신청’이어서다. 금요일엔 당연히 근무다. 회사는 비용 줄이고, 팀장은 연차를 다 소진하면서도 성과를 올리는 유능한 팀장이 되고, 우린 휴가 때도 일이 우선인 애사심 넘치는 직장인이다.
정준익(가명·33) 씨에게 이런 ‘쉼표 없는 삶’은 6년째다. 정 씨의 아내이자 같은 회사 후배인 이수영(가명·29) 씨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광고대행사의 광고기획자다. 업계 용어로 ‘광고주 케어(care)’가 주 업무다. “경쟁사 동향을 조사해 달라” “새로운 광고 전략을 세워 달라”는 등 광고주 요구를 수시로 받는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광고주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며 하루를 마감할 정도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 담당자의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을 용인할 리 없다. 담당자마다 여러 광고주를 맡다 보니 업무 인수인계도 쉽지 않다. 자칫 계약이라도 끊어지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담당자가 진다. 선택은 두 가지다. 휴가 따위는 애초 머릿속에서 지우거나 언제든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휴가를 떠나거나.
정 씨 부부는 신혼여행부터 이런 현실을 혹독히 체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챙겼다. 인터넷이 잘 터지는 호텔을 예약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신혼여행 5일 중 이틀간 노트북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광고주가 갑작스럽게 계약 내용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관광 일정 등을 취소하면서 평생 한 번뿐이라는 허니문은 물거품이 됐다. 남들 휴가 갈 때 소주잔 건네며 가까워진 부부지만 신혼여행마저 엉망이 되자 서로 할 말이 없었다.
더 야속한 건 귀국 후, 출근 첫날 팀장의 반응이었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재계약은 잘 해결됐느냐”는 질문이 전부였다. 그날 퇴근 후 평소 눈물이 많지 않은 아내가 눈물을 쏟았다. 가장 소중한 순간을 망쳤다는 생각에 한 번,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했다.
“휴가 가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거야. 광고주 때문에 휴가 못 간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니까. 광고주를 잘 달래서 다녀와야지. 내가 언제 휴가 못 가게 했어?”
부부의 꿈은 유럽 여행이다. 하지만 올해도 유럽 여행은 감히 꿈도 못 꾼다. 다만 이번만큼은 ‘한 주’를 온전히 쉬어 보는 게 소원이다. 신혼여행 때도 이루지 못한 ‘온전한 휴가’를 올해는 꼭 가져보고 싶을 뿐이다.
팀장은 또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휴가 계획서 늦지 않게 올려 주세요. 일이 몰리는 월초나 월말은 피해 주시고….’ 올해 부부의 꿈은 이뤄질까.
▼ “연차 소진” 약속했던 대통령도 57%만 써 ▼
직장 간부들도 휴가를 못 쓰긴 마찬가지다. 경제 부처의 A 과장은 지난해 휴가를 5일밖에 쓰지 못했다. 조기 대선으로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각종 정책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반면 A 과장과 함께 일하는 후배 직원들은 평균 10일씩 휴가를 갔다. ‘쉼표 있는 삶’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연차 사용을 독려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다.
한국 조직문화 특성상 직급이 올라가면 업무 범위와 책임이 넓어진다. 조직 내 대체인력을 찾기 어렵다. 특히 A 과장 같은 중간 간부들은 ‘샌드위치’ 신세다. 고위 간부가 휴가를 가면 일을 떠맡아야 하고, 아래 직원들의 휴가는 보장해줘야 한다.
김영주 일생활균형재단 WLB연구소장은 “조직의 업무를 면밀히 파악해 휴가자의 업무를 자연스럽게 인수인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 노동잡학사전 : 휴가시기는 근로자 마음
업무 ‘막대한 차질’ 생길때만 상사가 변경 가능
‘사용자는 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한다. 다만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상관이 허락해야 휴가를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 60조 5항에 따르면 휴가는 근로자가 정한 시기에 갈 수 있다. 사용자나 상관이 휴가를 가지 못하게 할 권리는 없다. 법으로만 따지면 근로자가 상관에게 휴가 결재를 올리고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다만 업무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는 경우에 한해 상관이 휴가를 연기시킬 수 있다. 파업 등 쟁의를 위해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연가를 내는 경우에도 회사는 휴가를 연기시킬 수 있다. 만약 근로자들이 이를 거부해 실제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면 징계 사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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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