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새기는 ‘각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의 유교 책판.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금속활자는 조선에서도 활발히 사용했지만 한 번에 10여만 자 이상을 주조했기 때문에 부담이 컸다. 그래서 주로 나라에서 반포하는 책을 만들 때 사용했다. 민간이나 사찰에서는 목판에 글자를 새겨 찍어내 책을 만들었다. 이때 목판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을 각수(刻手)라고 했다. 각자장(刻字匠), 각공(刻工), 각원(刻員)으로도 불렸다.
조선 중기 문인 이수광은 용봉사의 승려 묘순에게 시를 써 주며 이번 생은 스님이 아니라 각수라고 놀렸다. 각수는 민간인보다 승려가 많았다. 인조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원두표는 각수승 100여 명을 불러 모아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찍어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찰에서 펴낸 책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510종으로 승려 각수 3059명을 포함해 각수 3377명이 참여했다.
각수는 총책임자인 도각수(都刻手), 업무를 총괄하는 수두(首頭), 연락책을 맡은 공사원(公私員), 판각에 관련된 제반의 일을 처리하는 장무(掌務), 마구리를 맡은 목수, 책판을 다듬는 책공으로 나뉘었다. 간혹 양반이 조상의 책을 간행하는 데 각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채제공의 문집 번암집(樊巖集)을 간행한 기록인 ‘간소일기’에는 간행에 1만 냥이 필요했다고 나온다. 판재(목판)비, 편집비, 글씨 쓰는 비용이 전체의 4할가량을 차지했고, 각수의 판각비가 3할 정도였다. 1만 냥은 현재 가치로 4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므로 각수의 인건비가 10억 원이 넘는 셈이다. 작업을 하는 사이 명절이나 경조사가 있으면 각수에게 부조를 해줬으며, 검수하다가 잘못이 발견되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았다.
적지 않은 비용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조상의 문집을 간행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무리하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했다. 비용을 아끼려고 책의 분량을 줄이다가 저자의 의도와 멀어지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가문과 지방의 서원, 지역 유림이 문집을 공동으로 출판하는 체제가 마련됐다. 경판을 층층이 쌓으면 백두산 높이를 넘는다는 고려의 팔만대장경,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소장된 6만4000여 장의 유교 목판도 모두 각수들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