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쉼표 없는 삶’
#2.
‘남은 연차 늦지 않게 소진해 주세요.’
매달 반복되는 팀장의 공지다. ‘넵!’하고 답을 한 뒤 금요일 연차 신청을 올린다.
그런데 몇 번이나 숨을 골라도 혈압이 오른다. ‘거짓 신청’이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당연히 근무.
정준익(가명·33) 씨에게 이런 ‘쉼표 없는 삶’은 6년째다.
#3.
정 씨의 아내이자 같은 회사 후배인 이수영 (가명·29) 씨도 마찬가지다.
광고대행사의 광고기획자인 부부의 주 업무는 ‘광고주 케어(care)’다.
“경쟁사 동향을 조사해 달라”
“새로운 광고 전략을 세워 달라” 는 광고주 요구를 수시로 받는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광고주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며 하루를 마감할 정도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 담당자의 휴가로 인한 업무 공백을 용인할 리 없다.
담당자마다 여러 광고주를 맡다 보니 업무 인수인계도 쉽지 않다. 자칫 계약이라도 끊어지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담당자가 진다.
정 씨 부부는 신혼여행부터 이런 현실을 혹독히 체험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챙겼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호텔을 예약했다.
#5.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신혼여행 5일 중 이틀간 노트북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광고주가 갑작스럽게 계약 내용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
관광 일정 등을 취소하면서 평생 한 번뿐이라는 허니문은 물거품이 됐다.
출근 첫 날 팀장은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재계약은 잘 해결됐느냐”고 물었다. 야속했다.
#6.
퇴근 후 아내가 눈물을 쏟았다.
가장 소중한 순간을 망쳤다는 생각에 한 번,
회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했다.
“휴가 가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하는 거야. 광고주 때문에 휴가 못 간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니까. 광고주를 잘 달래서 다녀와야지. 내가 언제 휴가 못 가게 했어?”
팀장이 술자리에서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다. 팀장의 입을 묶어버리고 싶다.
#7.
(2017 직장인 일생활균형 실태조사 그래프)
부부는 지난해 휴가 20일 중 7일밖에 쓰지 못했다.
그것도 3, 4일씩 쪼개 써야 했다.
부부의 꿈은 유럽 여행이다. 하지만 올해도 유럽 여행은 감히 꿈도 못 꾼다.
‘한 주’를 온전히 쉬어보는 게 소원이다.
팀장은 또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휴가 계획서 늦지 않게 올려주세요. 일이 몰리는 월초나 월말은 피해 주시고…’
올해 부부의 꿈은 이뤄질까.
#8.
여러분의 ‘무너진 워라밸’을 제보해주세요. 설문 링크(bit.ly/balance2018)에 직접 접속하거나 직장인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블라인드’를 통해 사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2018.02.05.(월)
원본I 서동일·유성열 기자
사진 출처I 동아일보 DB·뉴시스·Pixabay·FLATIOCON
기획·제작I 유덕영 기자·김채은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