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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이웃]“어휴 냉동실이네”…최강 한파 속 쪽방촌에서의 하루

입력 | 2018-02-05 16:43:00

26일 오전 본보 조유라 기자가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서 24시간동안 지내며 생활상을 체험해보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전 본보 조유라 기자가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서 24시간동안 지내며 생활상을 체험해보고 있다. 전기장판이 있지만 새벽에는 찬 기운이 가득해 바닥은 미지근한 정도였다.

쪽방촌에서 40년간 생활했다는 서모 씨(72·여)의 방. 패딩 조끼를 입고 자야 할 정도로 방이 춥지만 이 방에 있는 난방기는 1인용 전기 히터가 유일했다.


“어휴 냉동실이네, 냉동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 누비옷을 위아래로 입은 한 여성이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높이가 1m 남짓 되는 건물 1층 문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철제 대문을 지나 쪽방에서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 오전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2도까지 떨어졌다. 입춘(立春)이 하루 지났지만 한파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25, 26일 1박 2일 동안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을 찾았다. 최저기온이 영하 17도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 전기장판 온도 ‘최고’…잠 못 드는 쪽방촌

옆방에서 나는 기침 소리, 가래 끓는 소리, 화장실 가는 소리….

26일 오전 2시경 기자가 6.6㎡ 크기의 방에 눕자마자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찌든 담배냄새는 참을 만 했다. 공용 화장실 쪽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관 동파를 막기 위해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 놓은 것이다. 화장실로 가봤다. 순간 온수기가 있어 따뜻한 물이 나왔다. 세수를 하자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따뜻한 물이 금 세 식은 것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세 시간을 채 자지 못했다. 오전 4시 50분 찬 기운이 느껴져 잠을 깼다. 건조하고 찬 공기에 코가 아팠고 입술도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무릎과 허벅지가 차게 굳어 있었다. 무릎이 얼어붙은 것처럼 시려 1, 2분 동안은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패딩 점퍼를 입은 상체는 그나마 괜찮았다.


얇은 벽과 나무 문은 새벽 칼바람을 막지 못했다. 바닥은 얼음을 만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전기장판 레버를 가장 높은 온도에 맞춰놨지만 열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다’보다 ‘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쪽방촌은 겨울에 특히 열악하다. 그럼에도 빈방은 드물다. 싼 값에 ‘달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쪽방 월세 가격은 20만~35만 원 정도. 비싼 방은 보일러가 가동되는 방이다. 주인들은 “사람들이 보일러가 없는 싼 방부터 찾기 때문에 비싼 방이 마지막까지 남는다”고 했다. 돈을 더 쓰는 것보다 추위를 참는 게 낫다는 것이다. 어떤 방에는 전기 장판마저 없어 입주자가 구해서 가져가야 하는 곳도 있다.


● 최강 한파 녹여주는 따뜻한 마음

쪽방촌 주민들의 하루는 새벽 일찍 시작됐다. 오전 5시 반쯤 밖으로 나가봤지만 옆방과 맞은편 방은 모두 비어 있었다. 주인은 “오전 4시 반쯤 나가야 건설 현장 같은 일용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30분 쯤 지나자 일을 나가지 않는 주민들이 한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25년을 생활했다는 주민 이모 씨(73)는 찢어진 틈으로 솜이 비집고 나온 패딩 점퍼를 입고 서 있었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손난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 동네 고장난 보일러를 고쳐주는 기술자다. 그래서인지 이 씨의 집은 월세 21만 원인데도 따뜻했다. 그러나 싼 만큼 열악했다. 화장실이 없기 때문. 그는 “집 연탄을 갈아야 한다”며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인근 슈퍼를 찾았다. 슈퍼 옆 커피 자판기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슈퍼는 적은 양을 사가는 사람이 많아 쪼개서 먹을 것을 판다. 삶은 계란은 500원, 홍시는 1000원 하는 식이다. 아침부터 술을 사가는 사람도 보였다. 기자가 잤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심모 씨가 슈퍼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 씨는 “새벽같이 나와 고철을 주으러 인근 동네를 세 바퀴 정도 돌았다”고 했다. 심 씨는 몸을 녹이며 슈퍼 주인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순간 아침에 방에서 나올 때 복도에 가지런히 놓인 기자의 신발이 떠올랐다. 어제 방으로 들어갈 때 아무렇게나 벗어두었었는데 누군가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심 씨는 “다 사람 사는 곳 아니냐”며 웃었다.


● SNS, 반려견…쪽방촌 주민들의 취미생활

한겨울 추위에 주민들은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으로 꽁꽁 숨어든다. 25일 오후에도 오후 6, 7시부터 일찌감치 끼니 준비를 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방 안에서 나름대로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한 건물 2층 쪽방에 8년간 살았다는 차모 씨(70)는 20년 전쯤 영등포 쪽방촌에 자리잡았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차 씨는 국민연금 등을 합쳐 월 70만 원으로 방세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차 씨가 최근 빠져 있는 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뿐만 아니라 젊은 층이 애용하는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계정도 모두 갖고 있다. 트위터 팔로어는 5000명이나 된다. 모 정당 지지자인 차 씨는 주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올리거나 공유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추억도 종종 남긴다. 몸이 불편해 주로 집에 있는 그에게 몇 안되는 재미다.

쪽방 관리인이자 주민인 서모 씨(72·여)는 ‘방울이’라는 작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운다. 방울이를 위해 반려견 전용 사료까지 구입해 정성으로 기르고 있다. 서 씨는 추위를 견디느라 패딩 조끼를 입고 매일 밤 잠들면서도 추위에 떠는 강아지 걱정뿐이었다. 그는 “방울이가 추워서 걱정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데…”라며 웃었다.

숙소 옆 집 쪽방에서 생활하던 한 70대 노인은 무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그의 방에는 전기장판, 옷걸이 2개, 겉옷 1개가 전부였다.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벌건 수제비를 바닥에 놓고 먹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는 취재진이 썩 달갑지 않은 말투로 “왜, 이런 거 보려고 온 거 아니었냐”고 되물었다.

길에서 만난 또 다른 60대 노인은 “요즘 구청이다, 시청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귀찮아 죽겠다. 그래봐야 실제로 바뀌는 것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잇달은 화재로 주변의 관심이 쏠려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당장의 화재 예방과 방한 대책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쪽방촌 개선 사업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국노숙인시설협회 산하의 한 쪽방상담소 관계자는 “시설 개선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생활을 개선해보겠다는 의욕을 가질 수 있게 교육 훈련이나 일자리 알선 등 정책이 강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김정훈 기자 hun@donga.com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