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외곽으로 벗어나자 잿빛 아스팔트는 어느 새 아프리카 특유의 검붉은 대지로 변했다.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도착한 곳은 나이로비에서 20km 남짓 떨어진 작은 도시 루이루.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한국기업 ‘사나그룹’이 바로 이곳에 있다.
지난달 17일 찾아간 사나그룹의 대형 가발 공장은 1만3000평 부지에 건물만 27개 동에 달했다. 마을 어귀에서 공장 입구로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변에 있던 케냐 여성 수백 명의 시선은 공장으로 들어서는 차량을 뒤쫓았다. 사나그룹 관계자는 “우리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며 “많이 몰릴 때는 2000명 넘게 줄을 서기도 한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5년 새 3배로 성장한 사나그룹
사나그룹은 최근 몇 년 새 케냐에서 삼성, 현대 등 글로벌기업보다 더 유명한 한국기업으로 성장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아프리카 여성들이 미(美)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면서 뷰티 산업 규모가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케냐에 진출한 사나그룹은 최근 5년 새 매출이 3배로 성장했다. 사나그룹은 지난해 연간 매출 1억 달러(약 1100억 원)를 넘겼다.
가발은 이제 아프리카 여성의 필수품이 됐다. 최영철 사나그룹 회장은 “얇고 쉽게 부서지는 모발의 특성 때문에 아프리카 여성들은 머리카락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며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이 크게 늘면서 도심 여성의 70~80%가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아프리카 순방 때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던 건 현지에서 1만 명 이상을 고용한 사나그룹 덕분이었다. 사나그룹 공장이 들어서기 전 루이루는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6년 새 인구가 7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 사나그룹이 지역 경제를 떠받치면서 도로와 학교, 병원 등 인프라 시설도 빠르게 갖춰지고 있다.
●아프리카 중산층을 잡아라
무디스도 현재 80만 명 수준인 케냐 중산층이 매년 10~12%씩 성장해 2030년 25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세스 이키아라 케냐 투자청장은 “케냐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인구도 매년 3%씩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무엇보다 정치·경제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바뀌면서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최근 케냐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이 늘고 있다. KOTRA에 따르면 2011~2014년 케냐에 진출한 기업은 삼성물산 등 4곳으로 대기업 위주였다. 하지만 2015년 이후 3년간 케냐 진출 기업은 8곳으로 늘었고, 투자분야도 다양해졌다.
한국의 정보기술(IT) 기업 이엠캐스트는 2016년 나이로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해 케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케냐 중산층의 소득이 성장하면서 고급 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케냐 현지 통신사 사파리콤이 자체 개발한 모바일 뱅킹시스템 엠페사(M-Pesa)가 세계적인 핀테크 혁신 사례로 꼽힐 만큼 케냐는 IT 잠재력이 큰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손성애 이엠캐스트 국제개발협력팀장은 “케냐에 진출한 2년간 가파른 성장세를 이루며 수익을 창출했다”며 “중산층 대상 교육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에도 저소득층을 위한 컴퓨터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의 본고장 케냐에 처음으로 한국형 커피전문점을 차려 대박을 터뜨린 청년사업가도 있다. ’케냐AA‘ 커피로 유명한 케냐는 정작 카페 문화가 없었다. 커피 한 잔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CJ 커피구매총괄디렉터로 일했던 황동민 씨(35)는 아프리카 커피 소비시장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2016년 나이로비에 ’커넥트커피‘를 열었다.
커넥트커피가 문을 연 뒤 같은 건물에 차량공유 서비스 우버(Uber) 동아프리카 본부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했다. 커넥트커피는 금세 나이로비 최고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올해 2호점 개점을 준비 중인 황 씨는 “앞으로 5년 안에 매장 20곳 정도를 더 내 많은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우 특파원 min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