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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복도 ‘30년 된 소화기’… 이걸로 가족 지킬수 있나요

입력 | 2018-02-06 03:00:00

[알아야 지킨다, 족집게 ‘생존 수칙’]<1> 화재는 가까이에 있다




《이제 안심할 곳이 없다. 동네 목욕탕과 여관, 그리고 병원까지…. 화마(火魔)는 알아서 피해가지 않는다. 가장 위험한 건 집이다. 2017년 발생한 화재 4건 중 1건이 집(주택)에서 일어났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가장 위험한 게 현실이다. 지난해 12월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를 시작으로 연이은 참사 탓에 어디서나 불이 날 수 있다는 ‘화재 공포’가 퍼지고 있다. 그러나 공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인 생존 수칙을 알고, 지키고,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 불이 났던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 설치된 소화기는 제조일자가 ‘1988’로 표시돼 있고 점검표도 달려 있지 않다(왼쪽 사진). 그나마 다른 소화기에는 점검표가 달려 있었지만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1일 오전 5시 20분경 서울 송파구 A아파트 지하 1층 의류수거함에서 불이 났다. 일찍 집을 나선 한 주민이 119에 신고했다. 다행히 크게 번지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이 약 30분 만에 진화했다. 하지만 연기는 계단을 타고 8층까지 번졌다. 주민 3명이 치료를 받았다. 47명은 급히 대피했다.


하루 뒤 A아파트를 찾았다. 지하에는 멀티탭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통신 케이블은 뒤엉켜 있었다. 소화기 9개 중 진화에 쓰고 남은 건 7개. 그중 4개는 사용연한(10년)을 넘긴 상태였다. 제조일자가 ‘1988’로 표시된 것도 2개였다. 입주가 1989년 시작됐으니 아파트 완공 때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점검표가 붙어 있지 않거나 있어도 아무 내용이 없었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소방시설법)’에 의해 지난해 1월부터 모든 분말소화기는 제조일부터 10년만 사용이 가능하다. 기간이 넘으면 성능검사에 합격한 제품만 1회에 한해 3년 더 쓸 수 있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아파트 소방점검 때 ‘30년 묵은 소화기’는 적발되지 않았다. 소방서는 아파트 측의 ‘셀프 점검’ 결과만 보고받았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각 동 경비원이 1, 2개월에 한 번씩 소화기 압력이 정상인지 흔들어 본다”고 말했다.

5일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화재의 26.6%가 주택에서 일어났다. 화재 100건당 사망자도 단독주택 1.96명, 공동주택 1.27명이다. 판매시설 1.13명, 음식점 0.11명보다 많다. 최돈묵 가천대 설비소방공학과 교수는 “사망자가 1, 2명 정도라면 적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쉬고 잠자는 공간’이 ‘깨어 있는 공간’보다 소방 대책이 열악하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달 화재로 일가족 3명이 숨진 서울 은평구 B아파트. 지은 지 30년 된 곳이다. 2일 만난 주민 이모 씨(64)의 집은 불이 난 가구와 멀지 않다. 이 씨는 “한번 불이 났으면 뭔가 대비하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흔한 안내문 하나 없다. 점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들은 오히려 “뭘 어떻게 대비해야 하느냐”며 취재진에게 물었다. 한 건물의 소화기 45대 중 41개는 10년이 넘었다.

경기 수원시 C아파트의 하얀 외벽에는 그을음이 시커멓게 남아 있었다. 지난해 12월 22층에서 발생한 화재 탓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화재 후 단지 곳곳에 ‘화재위험 밤낮 없고 화재예방 너나 없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화기 위치나 작동 요령을 모르는 주민이 많았다. 고령자가 많이 살지만 이에 맞춘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주민 김모 씨(77·여)는 “소화기가 집에 있지만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화재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이 나는 걸 막기는 어렵다. 하지만 피해를 줄일 ‘생존 수칙’은 분명히 있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재 주택 화재 예방은 개인의 안전의식 및 점검 노력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서형석 skytree08@donga.com·안보겸·이지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