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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선택권 좁은 희귀병 아동들

입력 | 2018-02-06 03:00:00

연명의료법, 자기 결정권 제한




여섯 살 재준(가명) 군은 짧은 생의 대부분을 약으로 통증을 억누르며 힘겹게 버텨왔다. 두 살 때 희귀난치성질환인 ‘백질이영양증’ 진단을 받으면서다. 재준 군의 주치의는 최근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어머니 이모 씨(34)는 머지않아 숨을 거둘 아들을 지켜보는 것도 힘들지만 아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하다.

얼마 전 이 씨 부부가 재준 군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자고 약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4일 전면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재준 군과 이 씨 부부는 미리 연명의료 포기 의사를 밝힐 수 없다. 포기 의사를 밝히려면 환자가 성인이거나 암 등 특정 질환을 앓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재준 군이 실제 사망에 임박한 상태(임종기)가 돼야만 포기 의사를 의료진에 통보할 수 있다. 이때 포기 의사 확인서와 가족관계증명서 등 각종 서류를 내야 한다. 이 씨는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마지막 순간 행정 절차에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새 법이 아동 희귀질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 법이 지정한 네 가지 질환(암, 만성 간경화,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말기 판정을 받은 미성년자는 숨지기 수개월 전부터 부모 등 친권자의 동의를 얻어 연명의료 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다. 아이가 너무 어려 연명의료 중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식이 없다면 부모가 대신 계획서에 서명할 수 있다.

문제는 재준 군과 같은 희귀질환 아동이다. 희귀질환 아동은 임종기 판정 뒤 숨을 거두기까지 시간이 성인보다 짧다. 그만큼 성인 희귀난치성 질환자처럼 사전에 연명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연명의료의향서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성인은 질환의 종류나 경중과 관계없이 전국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어디에서나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의사 1명만 확인해주면 실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계획서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하지만 의향서는 만 19세 이상만 쓸 수 있다. 희귀질환 아동은 부모가 동의해도 의향서를 쓸 수 없다. 지난해 말 시범 접수 기간에 이런 규정을 알지 못한 희귀질환 아동들이 의향서를 냈다가 철회당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2014년 한 해 희귀질환으로 숨진 미성년 환자는 731명으로 연명의료 계획서를 낼 수 있는 네 가지 지정 질환 사망자(313명)보다 두 배 이상으로 많았다.

김민선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선 의료진이 미성년 환자에게 건강 상태를 알리지 않고도 부모가 동의하면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며 “환자와 부모가 마지막 순간 행정 절차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지 않게 하려면 의향서 작성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