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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지예 “듣는 음악, 한 곡으로 인생 바꿀 수 있는 노래 쓰고 싶어”

입력 | 2018-02-20 03:00:00

20년 만에 앨범 낸 스타 작사가 지예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0일 만난 작사가 겸 가수 지예. 그는 인터뷰 중 이탈리아의 전설적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를 비롯한 천재와 시에 관한 이야기에 몰입하다 문득 “와인이나 한잔 하자”고 청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일어나 봐. 넌 어린 애가 왜 그렇게 센티멘털하니?”

서울 숙명여중 2학년 시절. 늘 그렇듯 수업시간에 또 멍하니 상념에 잠긴 그를 영어 교사가 일으켜 세웠다. ‘센티멘털’이란 네 음절이 꼭 운명의 신이 내린 명령 같았다. 얼음 번개처럼 그를 포박한 뒤 가슴에 박혔다. 늘 외롭고 어두웠던 자신을 영원히 들켜버린 듯했다.

박주연과 함께 1980, 90년대를 대표한 여성 작사가 지예. 그의 노랫말은 그러고 보면 자주 이별과 어둠을 향했다. 변진섭 2집(1989년)에서 박주연이 ‘반가운 눈처럼 그대는 내게로 다가왔죠’(‘숙녀에게’)라고 쓰면, 이어지는 곡에서 지예는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야윈 얼굴로 떠나간 너’(‘로라’)로 받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더 어두워졌나 봐요. 앨리스 쿠퍼나 핑크 플로이드의 장송곡 같은 음악, 생텍쥐페리의 비극적인 시를 대하는 순간엔 미쳐버릴 것은 느낌에 휩싸였어요.”

1985년 무렵 TV 프로그램에서 열창하는 지예. 유튜브 화면 캡처

지예는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 소방차의 ‘사랑하고 싶어’를 비롯해 조용필 이정석 윤상 강수지까지 400여 곡의 노랫말을 쓴 스타 작사가다. 이게 끝이 아니다. 고교 시절 미스 롯데에 입상했고, 이후 MBC 공채 탤런트에 뽑히는가 하면 KBS 가요제에 입상했다. 1985년 가수로 데뷔해 5집까지 냈고 두 권의 시집도 발표했다.

재능에, 눈에 띄는 미모를 겸비했지만 대중의 조명에서 멀었던 건 어쩌면 고집스럽고 까칠한 성격 탓이었는지 모른다. 지예는 1990년대 초반 당시 한 곡 작사에 300만 원을 받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제작자나 가수가 내가 쓴 노랫말의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조사(助詞) 하나라도 건드리면 전체 가사가 우르르 쏟아져 내릴 정도로 정밀하게 작업했다고 자부하거든요.”

연예인이 아닌 작가주의적 음악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가수로서 ‘엄마 말해줘요’를 히트시킨 때가 1992년. 곧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고 가요계 판도는 댄스음악 위주로 바뀌어버렸다. 목이 말랐다.

지예가 가수로 돌아왔다. 20년 만이다. 지난해 음반사 ‘오디오가이’의 제안으로 갈망하던 앨범 제작의 꿈을 이뤘다. 최근 낸 ‘She and Me(그녀와 나)’는 지예가 작사한 조용필 김범룡 김종찬 홍서범의 곡을 지예가 자신의 목소리와 새로운 편곡으로 재해석한 앨범이다. ‘천사의 눈물’ ‘엄마 말해줘요’ 같은 본인 대표곡의 새 버전도 담았다. 지예는 내친김에 이르면 올해 말 신곡 앨범도 낼 계획이다. 가을쯤 낼 세 번째 시집도 준비 중이다.

20년 공백기 동안 뭘 했냐고 물었다. “여행, 글쓰기, 생각하기, 음악 듣기, 종교와 철학 서적 읽기…. 밥숟가락을 들었다 벼락처럼 감정에 휩쓸려 5분 만에 시를 써내기도 해요. 집이 가장 좋지만 가끔 친한 이들과 와인을 마시며 천재, 시,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아요.” 지예는 “결혼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소녀가 중년이 됐지만 심장은 변하지 않는다. 지예는 여전히 센티멘털한 방랑자다. 그의 음악은 삶의 응달에서 나온다. “생텍쥐페리의 ‘산다는 것은 서서히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글에 한동안 미쳐 있었어요. 따라 부르는 음악이 아닌 듣는 음악, 한 곡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노래를 쓰고 싶어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