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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개척, 조선 지방당국이 계획… 식민지 경영 시도한 것”

입력 | 2018-02-21 03:00:00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청일전쟁 이전 간도 관련 자료 연구
“기근 피해 백성 대규모로 이주시켜 두만강 북쪽에 실질적 통제력 행사”




한중 양국의 자료를 망라해 간도 관련 연구서를 낸 김형종 서울대 교수가 14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조선과 청의 정계(定界)와 관련된 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정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이며, 두만강 너머 북간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간도 문제’의 뿌리에 19세기 말 조선 지방당국의 ‘식민지 경영’이 있었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청일전쟁 이전 간도 관련 양국의 대응에 대한 자료와 연구를 망라한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를 최근 발간했다. 책에 따르면 간도 개척은 가난한 백성 소수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 것이라기보다 지방당국의 비호 아래 대규모로 이뤄졌다.

김 교수는 1909년 용정촌에 광성서숙을 세운 윤상철의 아들 윤정희가 19세기 후반∼1930년대 초반 간도의 교육·종교·독립운동을 정리한 ‘간도개척사’에 주목했다. 이 책에 따르면 1880년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는 ‘국토를 넓히는(廓拓·확척)’ 공을 세우고자 “기근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월변(越便·두만강 북쪽 지역)의 토지를 개간하고 이주를 허가할 것이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원서(願書)를 올리게 하라”고 지시했다. 함경북도 안무사 조병직도 이를 묵인했다. 이른바 ‘경진(庚辰)개척’이다.

1880년과 이듬해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회령 맞은편 평야 100여 정보를 순식간에 개발했다. 이전에도 수십∼수백 명이 개별적으로 강을 건넌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정착한 건 처음이었다.

1881년 9월 청나라 관리 이금용은 두만강 북안 약 200리 이내 지역을 조사해 대규모 월간민(越墾民)을 발견하고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의 함경도자사는 그들에게 경작을 허가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고 했다. 조선의 함경북도 당국이 월간민에게 호적을 편성하고 각종 세금과 소작료를 거두는 등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것이다. 1885년 무렵 조선월간민의 수는 2만 명이 넘었고, 지역 경제는 두만강 북안 간도에 심각하게 의존하게 된다.

김 교수는 “조선 지방당국은 일단 백성을 대규모로 월간, 이주시켜 두만강 북쪽에 실질적 통제력을 행사하고 이후의 분쟁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며 “일종의 식민지 경영을 시도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이후 조선과 청이 국경회담과 두 차례에 걸친 공동 조사(勘界·감계)를 벌이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조선은 여기서 백두산정계비에 따라 원래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조선의 토문감계사 이중하(1846∼1917)는 고종에게 사뭇 다른 내용으로 비밀 보고를 올렸다. 애당초 정계비를 세울 때 물길을 착각한 것이며, 토문강과 두만강은 같은 강이고, 조선과 청의 경계는 두만강이 맞다는 취지였다. 양국은 국경 문제에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월간민은 청나라 당국이 통제하게 됐다.

김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민족사의 무대가 됐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감성적으로는 호응하기 쉽지만 사실 곤란한 발상”이라며 “천지 남쪽 5km 지점에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들면 백두산이 오히려 중국 땅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