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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송평인]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한국

입력 | 2018-02-23 03:00:00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에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을 만든 건 1972년이다. 이듬해 그곳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0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었다. 정치는 암울했지만 개발의 망치 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지던 때다. 농촌을 떠나 도시의 삭막한 환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종교에서 구했다. 교회마다 부흥사들의 전도 집회가 열렸고 그런 흐름의 시작에 그레이엄 목사가 있었다.

▷그의 1973년 여의도 집회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못지않게 컸던 1980년 여의도 집회에는 가봤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인 설득보다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말 한 단락이 끝나기도 전에 김장환 목사의 통역이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나중에 세계침례교총회장까지 된 김 목사가 유명해진 것은 1973년 집회의 통역을 맡으면서부터. 하지만 거꾸로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 출신인 그의 유창한 통역이 없었다면 설교의 감동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북한 공산당 격퇴를 촉구하고 1952년 전쟁 중인 한국을 방문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90년대 두 차례 방북해 김일성과도 만났다. 김일성은 트루먼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조언자였던 그레이엄 목사와의 만남을 마다하기는커녕 미국과의 대화 채널로 활용하려 했다. 그레이엄 목사로서는 평양에 외국인을 위한 교회를 짓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레이엄 목사는 미국 대통령들과 친하고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와 친했기 때문에 이 커넥션은 한미 관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때는 아들 프랭클린 목사가 김 목사의 주선으로 사전에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여기서 오간 문 대통령 부모의 흥남철수 얘기가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전달돼 회담을 부드럽게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미국의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