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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名문장]사람은 말하며 침묵하는 존재다

입력 | 2018-02-24 03:00:00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침묵은 밤의 어둠이 아니라, 말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모여든 밤의 광채다. 침묵은 말을 빛나게 하기 위해 휴식한다.’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사람은 말을 하며 산다. 사람은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속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 도약한다.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에도 말을 한다. 생각이란 실은 자기 혼잣말이다. 생각에 잠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사람은 단지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을 통해 개별성이 나타나고 자라난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있음의 곤궁에서 벗어나 자기 존엄성을 빚으며, 내적 광휘를 품은 존재로 도약한다.

말은 자기표현과 소통의 매개이기 이전에 빛이다. 말은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말 속에서 거주한다. 제 말에 둥지를 틀고 거주하는 존재는 빛난다. 반면 말하지 못하는 동물은 빛에서 소외된다. 동물은 말의 부재라는 어둠으로 가득 찬 곤궁 속에 내팽개쳐진다! 사람이 말을 매개로 도약한다면 동물은 그저 ‘땅의 표면을 따라, 그 어둠을 향해, 옆으로 확장’한다. 동물이 침묵의 덩어리라는 사실은 동물이 밝은 곳에 있더라도 ‘빛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에서 드러난다.

사람은 말을 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순간 몸-형상에서 자기 자신으로 빚어진다. 말이 없다면 그는 단지 걸어 다니는 몸-형상에 지나지 않을 테다. 말은 찰나에 출현하지만 그 찰나를 물고 영원으로 향한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지만 때때로 말이 그를 불멸로 이끈다. 장 파울의 말처럼 ‘언어는 무한함을 가르는 가장 섬세한 분할선’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의 말이 살아서 회자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어떤 말은 오염되고 부패해서 말하는 자의 정신과 인격을 일그러뜨린다. 거짓말은 깨어져 부스러기가 된 말, 더러운 말, 뿌리 없이 떠도는 말이다. 오늘의 시대는 그런 거짓말이 득세한다. 언어가 창조의 결산서라면 거짓말이 득세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결산서도 나올 수가 없다. 거짓말은 그것이 발신되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정신을 교란시키고 허둥거리게 할 뿐이다.

거짓말은 소음이라는 점에서 죽은 말, 얼이 빠진 말이다. 말의 타락은 곧 사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누가 거짓말에 달라붙은 오탁을 씻겨 새롭게 빚을 수 있는가? 누가 거짓말을 침묵으로 이끌어 정화할 수 있는가? 시인은 언어가 최초로 잉태되는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말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모여든 밤의 광채’ 속에서 언어의 원초적 기쁨을 되살리며, 언어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회귀하게 돕는다. 반면 시인이 죽은 사회는 온갖 거짓말이 넘치는 바닥으로 변하고, 사람은 오물이 된 말과 함께 나뒹군다. 의사이자 철학자인 막스 피카르트가 ‘시는 지상의 성좌이자 동시에 하늘의 성좌다’라고 말하는 까닭을, 우리는 곱씹어봐야 한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