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종사 생텍쥐페리의 아프리카
생텍쥐페리가 비행기를 몰다 두 번이나 추락한 사하라 사막. 그의 영혼을 정화하고 작품의 영감을 얻은 곳이다. 동아일보DB
유로화를 쓰기 전 프랑스 50프랑 지폐의 모델이었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는 리옹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부유한 외가 덕분에 프로방스의 고성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12세 때 처음 탄 비행기에 매료된 소년은 20대 초반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한다. 이후 스페인 국경과 가까운 툴루즈에서 국제우편 항공기 조종사로 일하며 카사블랑카(모로코)∼다카르(세네갈) 노선을 개척한다.
대표작 ‘어린 왕자’에는 지명과 수치에 집착하는 고지식한 할아버지 지리학자가 등장한다. 학창시절 따분한 지리학에 질린 생텍쥐페리였지만 동료 조종사 앙리 기요메 덕분에 지도 읽는 재미에 푹 빠진다.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곳을 비행해야 했던 조종사들에게 지도와 나침판은 필수품이었다. 작은 개울, 꽃과 나비, 양치기 소녀, 올리브 나무, 농가의 불빛이 표시된 그의 스페인 지도는 동화책이 되어갔다.
비행기 엔진 고장이 잦고 자동항법장치도 부실했던 시절, 조종사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었다. 기요메는 안데스 산지에서 죽을 뻔했고 생텍쥐페리는 사하라 사막에 두 번이나 추락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사막에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한 체험을 하며 그의 영혼은 순금처럼 정화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삶의 비밀을 깨닫게 해준 사막은 지혜의 샘물이 숨겨진 오아시스였다. 모로코 남서부 주디(Judy) 곶에서 근무할 때 틈틈이 집필한 ‘남방 우편기’를 비롯해 ‘야간 비행’, ‘전시 조종사’, ‘바람과 모래와 별들’, ‘어린 왕자’까지, 그가 쓴 책의 주요 배경은 모두 사막이다.
사고 후유증과 극심한 고통으로 지쳐가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는다. 병원에서 안데르센 동화책을 읽으며 동심의 세계에 접속한 그는 미국 어린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린 왕자’를 구상한다. ‘어린 왕자’는 그의 순수한 고독과 전설적 사랑이 압축된 자서전 같다.
‘어린 왕자’의 장미는 아내 콩쉬엘로였다. 남미 커피 재벌가 딸인 그녀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한 재원이었다. ‘화산의 나라’ 엘살바도르 출신답게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여러 작가와 예술가의 마음을 훔친 뮤즈이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생텍쥐페리의 열렬한 구애로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뉴욕의 대저택에서 모처럼 아내와 오붓한 행복을 누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집필을 마치고 홀로 귀국해 공군에 자원입대한다. 1944년 한여름, 나치가 점령한 고향 일대를 정찰하기 위해 출격한 후 그의 행적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은 어린 왕자가 지구별과 작별하는 황홀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달콤한 신혼을 즐긴 향수 마을 그라스,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의 놀이터, 사랑하는 어머니가 살아계신 마을의 풍경이 표시된 마음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을 테니까.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