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소도시의 오래된 좁은 길들을 걸으며 나는 수천 년에 걸쳐 이 길을 걸었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을 생각한다. 길을 덮고 있는 것은 돌과 흙만이 아니다. 오는 곳과 가는 곳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르고 사연들이 제각각인 사람의 발들이 포개져서 지금의 길이 되었다. 유물과 유적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길이 사람을 증거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이 고전적인 질문은 길과 사람의 사연(역사)을 하나로 보고 있다. 온 길과 갈 길을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인생을 서술하는 것이다. 길에는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의 기억과 욕망과 꿈이 어우러져 있다. 그것들이 길을 이루고 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세잔의 이름이 촘촘히 박힌 길들을 만난다. 여행자들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이 도시가 좋아하는 화가를 만난다. 그가 살았던 집, 그가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매일같이 오르내렸던 언덕길을 걸으며 여행자들은 화가의 기억과 욕망과 꿈을 생각한다. 그의 기억과 욕망과 꿈을 자기 몸에 담으려 한다. 그 길은 세잔이 화구를 등에 지고 수없이 걸었던 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은 그가 걸었던 것과 똑같은 길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그 길을 걸으며 세잔이 본 풍경을 본다. 그렇지만 그가 본 풍경은 세잔이 보았던 것과 똑같은 풍경은 아니다. 시간은 거리이다. 짧은 시간은 짧은 거리이고 긴 시간은 긴 거리이다. 거리는 인식과 감상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한때 중요하던 것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한때 중요하지 않던, 그러나 나중에 중요해진 어떤 것이 달라붙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길이 그 길이 아니라고 할 수 없고, 여행자들이 그가 본 것과 다른 것을 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과거에 살았던 이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그런 순례가 의미 없다고 할 수 없다.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고, 다르지만 같은 풍경을 보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욕망하고 꿈꾸는 사람의 발들을 길이 기억하고 욕망하고 꿈꾸기 때문이다.
그 산은 화가로 하여금 계속 그리게 할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산, 더 영감을 주는 산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산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어 그림을 그리게 했지만 화가는 그림을 통해 이 산을 영감 넘치는 산으로 만들었다. 마치 고흐가 그린 ‘구두 한 켤레’나 ‘의자’가 그런 것처럼, 저 산도 화가의 붓에 의해 영원을 얻었다. 사물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은 작품이다.
여행객이 보는 것은 지금 거기 있는 산이지만, 동시에 화가가 그때 본 산이고,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산이고, 그리고 그 산들을 통해 기억하고 욕망하고 꿈꾸는 자기 자신의 산이다. 길은 길을 걷는 사람의 눈을 열어 풍경 속에 압축된 시간을 보게 한다. 풍경을 새롭게 하고 풍경을 보는 사람 자신을 새롭게 한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