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는 나 자신뿐”이라는 당찬 ‘피겨 요정’ 알리나 자기토바(러시아).
안영식 전문기자
스포츠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단순히 연습량에 비례해 기록과 메달 색깔이 결정된다면 싱거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릴 이유도 없다.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같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선수는 인공지능(AI) 로봇이 아닌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렇다.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팀들의 퍼포먼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차이가 바로 실력인데,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느냐 여부가 관건이다. 각종 징크스도 핵심은 멘털이다.
역대 스포츠 스타 중 단연 돋보이는 멘털 갑(甲)은 ‘피겨 여왕’ 김연아(28)다. 2010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 바로 다음 순서였다. 그런데 당시 링크는 자신의 시즌 최고점(73.78점)을 기록한 아사다를 향한 박수와 환호가 가득 찬 상태였다.
두 선수의 밴쿠버 맞대결은 프리스케이팅 출전 순서 추첨에서 이미 결판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트 때와 정반대로 김연아의 바로 뒤가 아사다였다. 김연아는 쇼트에 이어 프리에서도 무결점 연기를 펼쳐,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인 228.56점(쇼트 78.50점+프리 150.06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관중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경기에 나선 아사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른 아사다는 경기를 마친 직후 패배를 직감한 듯 고개를 떨궜다. 스케이팅 기술의 난도보다는 심장의 ‘두께’가 가른 승부였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서도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는 강철 멘털 소유자들의 차지였다. 대표적인 예가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남녀 우승자인 숀 화이트와 클로이 김(이상 미국)이다. 두 선수는 중압감을 떨쳐내고 각자의 ‘필살기’인 백투백 4회전(1440도)과 3회전(1080도) 점프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절대 강자)’이었다.
스포츠심리학에 따르면 선수들의 목표 설정은 ‘결과 중심’과 ‘과정 중심’으로, 동기 유발은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로 나뉜다. 결과와 외부 자극을 중시하는 선수의 목표는 우승이며 대결 상대는 경쟁자들이다. 반면 과정과 자기만족을 중요시하는 선수의 목표는 꾸준한 기량 향상이며 비교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연구 결과, 후자의 멘털이 훨씬 건강하며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영원한 절대 강자는 없다. 주니어 시절만 해도 김연아에게 당시 트리플 악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피겨 천재’로 불렸던 아사다는 ‘넘기 힘든 산’이 아니었던가. 두 선수의 첫 맞대결인 2004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아사다는 김연아를 35점 차로 제치고 우승했었다. 하지만 이후 6년의 세월은 하늘 아래 두 명의 ‘피겨 여왕’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선 윤성빈이 마르틴스 두쿠르스(라트비아)로부터 ‘스켈레톤 황제’ 타이틀을 넘겨받았다.
23회째 겨울올림픽인 평창 대회가 17일간의 열전을 마쳤다. 축제는 끝났다. 하지만 또 다른 시작이다. 과도한 긴장과 부담감 탓에 4년을 기다려온 올림픽 무대에서 눈물 흘리고, 한순간 방심으로 다 잡은 대어를 놓친 선수들은 와신상담 다음을 기약할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이기면 즐겁다. 그런데 4년은 긴 세월이다. 즐겨야 버틸 수 있고, 그래야 이길 수 있다. 태극전사들에게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중요하다. 일과 삶의 균형, 페이스 조절은 당장의 성적뿐만 아니라 롱런 여부도 가른다. 하물며 그것이 스포츠뿐이겠는가.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