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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머리-화장-주례까지… 만능 결혼식 도우미

입력 | 2018-02-28 03:00:00

신부도우미 ‘수모’




전통 혼례 모습을 담은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시집가서 잔 붓는 모양’.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우리나라에서 혼인과 회갑 잔치에 쓰는 병풍, 탁자, 자리, 향촉 따위는 관청에서 빌리고, 그 밖의 골동품은 상점에서 빌린다. 머리장식, 가체, 비녀, 가락지, 비단, 예복, 스란치마 등 꾸미는 물건은 장파(粧婆)에게 빌린다. 속칭 ‘수모(首母)’라고 한다.”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수모는 수식모(首飾母)의 준말이다. 우리말로는 ‘머리 어멈’, 곧 지금의 헤어 디자이너다. 화장과 의상도 담당했으니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도 겸했다. 혼례가 있으면 신부가 입을 옷과 장신구를 빌려줬고, 예식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웨딩 플래너’ 역할도 했다.

수모는 한양에서는 동서남북중 5부(部)의 행정구역별로 활동했다. 왕실의 혼례가 있으면 한양의 수모를 전부 대궐로 불러들였다. 행사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머리 손질과 화장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궁중 여성들이 착용하는 가체(加체)를 손질하는 일도 수모가 도맡았다. 수모들은 대궐에 모여 나무빗과 솔로 가체를 다듬은 뒤 다시 염색하고 광을 내어 새것처럼 만들었다.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에 동원된 수모는 모두 25명이었다. 1788년 정조가 가체 사용 금지령을 내리면서 한양의 수모를 한자리에 모았는데 총 33명이었다. 한양 부잣집은 단골 수모를 지정해 두고 집안 여성의 몸단장을 전담케 했다.

반면 시골은 수모를 구하기 어려웠다. 성호 이익은 “시골에서 혼례를 치르면 한양의 수모를 불러오기 어렵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수모를 쓰려면 비용이 몹시 많이 든다”라고 했다. 경상도 성주에 살던 이문건은 손녀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청도에 사는 수모를 불러와야 했다. 청도군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달랜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 노비와 말을 보내 태워왔다. 상전이 따로 없었다. 수모가 집에 도착하자 쌀과 팥을 열 말씩 줬고 돌아갈 때는 무명 두 필을 주었다. 합쳐 쌀 두어 가마 값이니 적지 않은 금액이다. 수모에게 비단까지 주는 일도 있었던지 이를 금지하는 법령도 있었다.

사치가 성행하면 수모가 제재를 받았다. 1541년 사치스러운 혼례를 금지한 법령에 “신부가 청색, 홍색의 금실 두른 옷을 입으면 수모까지 죄를 묻는다”라는 조항이 있다. 1788년 정조는 한양의 수모들을 모아놓고 가체 사용 금지를 전하는 한편 신부가 족두리를 착용하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권장했다. 그러자 화려한 족두리가 유행했다. 정조는 칠보족두리 따위를 빌려주는 수모는 유배형에 처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전통 혼례는 주례가 없지만 굳이 찾는다면 사회자에 해당하는 집사보다는 수모가 주례에 가깝다. 이덕무의 ‘김신부부전’에는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면 수모가 합환주를 마시게 한 다음 덕담을 하며 축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수많은 혼례를 치르며 여러 부부를 보아온 경험 많은 수모는 주례에도 적격이었던 것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