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들 ‘외칠 수 없는 미투’]<中> 성폭력 올가미가 된 결혼
《 남편만 바라보고 한국으로 시집온 결혼 이주여성들이 남편과 남편의 가족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주여성들은 이혼을 당하면 추방될 가능성이 높아 폭행을 참아 넘긴다. ‘울타리’가 돼 줘야 할 가족은 이들의 피해를 묵인하고 가두는 ‘올가미’가 돼 버린다. 한국의 결혼 이주여성들이 ‘외칠 수 없는 미투(#MeToo·성폭력 고발 운동)’를 본보에 털어놨다. 》
《 40대 태국인 여성 잉(가명) 씨는 서울의 한 태국 마사지숍에서 일하다 손님으로 알게 된 남편과 5년 전 결혼했다. 결혼 전 남편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결혼 후 돌변했다. 잉 씨가 잠자리를 거부하면 마구 때렸다. 남편은 잉 씨가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까지 매질을 했다. 그러고는 또 갑자기 돌변해 잉 씨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울지 마. 나랑 같이 자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
5년 전 결혼한 한국인 남편에게 잦은 성폭행을 당했던 40대 태국 여성 잉(가명) 씨는 “추방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편과는 꼭 이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11일 경기지역 한 카페에서 본보와의 인터뷰를 끝낸 잉 씨가 임시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역 계단을 오르고 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결혼 이주여성들은 국제결혼이 늘기 시작한 2000년대 전후에 주로 농촌 총각들과 다문화가정을 이뤘다. 다문화가족 전화 ‘다누리콜센터’에 따르면 2016년 11월 현재 결혼 이주여성은 25만7404명. 이들이 낳은 다문화자녀도 20만 명을 넘어섰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이주여성들도 있다. 하지만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의 이혼율은 2008년 28.1%에서 2016년 37.8%로 높아졌다. 이주여성상담센터 활동가와 인권변호사들에 따르면 가족이란 이름에 가려진 채 남편이나 남편의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이주여성의 상담도 늘고 있다. 결혼 이주여성들이 이혼을 할 경우 자녀 양육권을 갖거나 남편에게 명확한 귀책사유가 있지 않는 한 추방된다. 이 때문에 결혼 이주여성들은 모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질과 성폭력을 참아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대 필리핀 여성 티파니(가명) 씨도 8년 전 한국으로 시집을 온 뒤 남편의 성 학대에 시달렸지만 참고 버텼다. 남편은 야한 동영상을 보여주며 잠자리에서 그대로 따라할 것을 요구했다. 신혼 초에는 남편이 조금 특이한 취향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남편의 변태적 요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럴 때마다 티파니 씨는 “나는 로봇이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티파니 씨는 “남편은 같은 집에 살고는 있지만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성적인 노리개로 여기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채희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장은 “상담을 해보면 건전한 가정을 이루고 살려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성이 많다”고 전했다.
○ “나는 출산 도구가 아니에요”
결혼 이주여성의 친정 가족까지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다. 필리핀 여성 제니(가명·20) 씨는 2년 전 한국에서 결혼하는 언니를 보러 한국에 왔다가 변을 당했다. 한국인 예비 형부 J 씨(39)는 다른 예비 처가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언니까지 집을 잠시 비운 사이 제니 씨를 덮쳤다. 제니 씨는 언니의 결혼을 망칠까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다 언니가 결혼식을 치른 뒤 성폭행 피해 사실을 힘겹게 털어놨다. 언니는 이혼했고 J 씨는 재판에 넘겨졌지만 증거 부족으로 최근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니 씨는 “가족 내 성폭력은 저항하기도 힘들고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기도 어렵다는 점을 재판부가 알아주길 부탁한다. 그래야 ‘미투’를 외치는 여성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행 제도는 이혼의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는 점이 확실해야만 이혼한 뒤에도 이주여성이 체류 자격을 보장받는다. 결혼 이주여성들을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포=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