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논설위원
“미국과 북한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①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및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영변에서의 핵 활동에 대한 모라토리엄 이행에 동의한다. ②북한은 영변의 우라늄 농축 활동에 대한 모라토리엄의 검증·감시와 5MW 원자로 불능화를 확인하기 위한 IAEA 사찰단의 복귀에 동의한다…”
신문에 이런 뉴스가 나오면 얼마나 놀랍고 반가울까.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김영철에게 비핵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소식에 기대에 부푸는 게 우리의 현실이니….
그런데 앞에 소개한 문장들은 6년전 아침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2012년 2월 29일 미국과 북한은 ‘2·29 합의’를 동시 발표했다. 당시의 북한 최고지도자 역시 김정은이었다. 미-북간 중매자를 자임하는 문 대통령의 노력이 6년 전 같은 합의를 재현할 수 있을까? 요즘 국내에서는 김영철이 비핵화 언급을 ‘경청’하고 북미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한데 대해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그러나 미국의 기류는 다르다.
물론 그 타이밍이 될 때까지 트럼프가 북한과의 대화를 아예 거부할 것이라는 설명은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화의사도 밝히고 다음날은 다시 얼굴을 붉히고, 또 다음날은 한번 만나보라고 지시할 수 있지만, “벼랑 끝까지 압박해야만 진짜 협상이 시작된다”는 큰 흐름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진정 태도변화가 있는걸까? 전문가들은 이 역시 고개를 흔든다. 지금까지의 제재와 압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특수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은 주민 200만 명이 굶어죽어도 마이웨이를 고집한 체제다. 국제제재로 궁지에 몰려있지만 김정은은 비핵화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궁색할대로 궁색해진 상황에서 한국을 약한 고리로 끌어내는게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남쪽을 향해 비둘기를 날렸다는 해석이다. 그러면서 남북정상회담 카드도 내밀었다. 김정은은 정상회담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남한 대통령들이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란 걸 안다.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미-북관계의 진전이 있어야 하므로 남한은 계속 중매에 나설테고, 그 결과 한미균열이 생기거나 미국과 협상할 기회가 생기거나 둘중의 하나라 계산했을 것이다.
대화는 필요한데 미국과 북한의 본심이 이래선 전망은 밝지 못하다. 6년 전엔 어떻게 협상타결이 가능했을까. 당시 한국과 미국은 1년 넘게 작업해 공동 스크립트(원고)까지 만든뒤 2011년 7월 김정일의 북한을 상대로 협상에 돌입했다. 1차로 남북이, 2차로 미-북이, 3차로 남북이, 4차로 미-북이 마주 앉았다. 한국과 미국이 태그매치를 벌이듯이 번갈아 북한을 상대하는데 조금의 균열도 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잠시 멈춘 협상은 2012년 2월 미-북간의 세 번째 회담에서 타결됐다. 김정은은 불과 영양지원 24만 t과 비핵화의 길로 접어들겠다는 약속을 맞바꿨다.
난도는 높아졌는데, 가장 큰 무기인 한미공조는 어떤가. 스크립트까지 공유했던 6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미국은 문턱을 낮추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에 나섰던 전직 대통령들을 열거하며 “그들은 25년 동안 대화를 해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느냐”고 성토하는 상황이다. 한미간에 공동 스크립트는 커녕 로드맵이라도 공유하는게 있는지 걱정스럽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