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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재경]정치권, ‘미투’ 넘어 ‘위드유’로

입력 | 2018-03-01 03:00:00

‘미투’ 많은 사법·문화·교육계, 남녀 위계질서 중시하면서 공권력 개입 꺼리는 직역들
‘권력형 성폭력’ 뒤늦은 처벌에 현행법으로는 한계 있다
국회, ‘위드유’ 특별법 만들어 공소시효 없는 진상 조사를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시발점은 검찰이었다. 놀랄 새도 없이 노(老)시인의 상상 초월의 추태가 폭로되더니 ‘미투(#MeToo)’ 운동이 봄바람을 탄 거센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도 처음에는 부인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보이더니 국민 분노에 놀랐는지 대부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딛고 성적 피해를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미투 운동을 전 국민의 88.6%가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가 크게 바뀌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

최근 피해가 폭로된 곳은 대개 학교, 검찰·법원, 문화·예술계, 연예계, 스포츠계, 병원, 종교계 등이다. 남녀가 도제 교육이나 수직적 위계질서로 상하관계에서 일하는 직역(職域)이 대부분이다. 교육·사법·종교·문화 등 자율과 독립이 강조되는 속성상 국가 공권력의 관여를 꺼리고 차단하는 곳이기도 하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단순한 성범죄를 넘어 ‘권력형 성폭력’에 있다는 징표다.

우리 형법은 자신을 지키기 어려운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한 성범죄를 무겁게 처벌한다. 하지만 미투 운동 사례를 보면 법이 예상하지 못한 여러 곳에서 야만적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다.

여성 인권이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서, 이중으로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인 여성이 실명으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기는 어렵다. 익명성 인터넷 공간인 ‘대나무 숲’에서의 미투 호소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삼국유사에 신라 경문왕과 모자장수 이야기가 나온다. 경문왕은 귀가 길어져 모자를 쓰게 됐다. 왕은 모자장수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모자장수는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 대나무 숲에 가서 왕의 비밀을 외쳤고 이후 바람이 불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왕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지만 그 숲에서도 같은 바람소리가 났고, 결국 임금님 비밀을 온 백성이 알게 됐다고 한다. 피해를 당한 약자에게 큰 용기를 기대하기 어렵기에 인터넷 대나무 숲에서라도 마음껏 피해를 고발하고, 가해자를 욕하도록 응원한다.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구원 요청, 미투 운동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충분한가. 검찰과 경찰은 폭로 사례를 철저하게 수사해서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정부는 여성가족부에 범정부협의체를 구성하고 100일간 공공 부문에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특별 신고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모든 성폭력 공무원은 벌금 300만 원 이상 형을 받으면 즉시 퇴출시키고, 성희롱 공무원의 고위직 승진도 막겠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예술계나 스포츠 등 민간 영역의 성범죄 실상을 감안하면 부족하다. 시스템 보완의 문제도 있다. 우선 성폭력과 성희롱에 대한 사법적 제재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성희롱은 형사처벌이 어렵고, 성추행·성폭행은 공소시효로 10년 넘은 일의 처벌이 불가능하다. 2013년 6월 이전의 일은 친고죄라 고소 없이 처벌이 어렵지만 범인을 알게 된 지 6개월이 지났으면 고소할 수 없다. 이래저래 범죄자 처벌에 장애 사유가 많다. 손해배상도 가능하지만 사건 발생일로부터 10년, 피해 사실을 알고 난 뒤 3년을 지나면 소송이 어렵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이 모든 직역에 활발하게 진출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정치권, 특히 국회가 나서서 특별법으로 ‘위드유(#With You)’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청문회를 열고 특별검사도 도입해야 한다. 이런 일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 피해자들이 마음 놓고 신고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공소시효와 무관하게 철저한 진상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성범죄자 중 처벌 가능한 사람은 엄하게 처벌하고, 시효가 지난 경우는 비형사적·사회적 제재라도 부과해야 한다. 최소한 ‘진실의 고백’, ‘참회 어린 사과(謝過)’와 ‘사회적 기억(Memoria)’은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경문왕이 대나무 숲을 베고 백성과 소통을 기피했기에 치세 중 자연재해가 잦고 역병이 성행했다고 한다. 기적에 가까운 용기의 분출을 지켜보면서 차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 개선에 국회와 정치권의 분발을 촉구한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