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2019,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화> 밀명 “조선서 3월초 만세운동… 도쿄는 한달 먼저 실행하라” 이승훈-길선주 등과도 극비 접촉… 요원 일부 체포돼 고문끝에 옥사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 모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묘사한 그림. 천도교 제공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국내외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倔起)’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상하이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이라는 소중한 열매가 맺혔다. 이듬해 창간한 동아일보 역시 3·1운동의 산고를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창간 주역인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는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일원이기도 했다.
그간 3·1운동에 대한 적지 않은 책자와 논문이 발표됐다. 대부분 특정 사안에 대한 조망이나 특정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물 연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해왔다. 그러다 보니 3·1운동 하면 ‘고종 황제 독살’ 소문이 계기가 됐다는 등 파편적으로 인식돼 온 것도 사실이다. 10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3·1운동의 기획 단계에서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은 다소 미흡했다.
때는 1919년 1월 말, 중국에 기반을 둔 비밀 독립운동 조직 ‘동제사(同濟社)’의 밀명이 각 지역 요원들에게 떨어졌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 패륵로(貝勒路)에서 활동하던 20대 중반의 청년 요원에게도 지령서가 전달됐다.
‘각지에서 우리 동포는 독립을 선언하여 운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그런데 일본 관헌은 반드시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보도하는 것을 금할 것이 명백하므로, 귀하는 일본인처럼 복장을 하고 도쿄(東京)와 경성(서울)에 가서 운동의 상황을 상하이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인 동지 조동우에게 기별하라.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본 유학생들. 가운데 줄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이다. 몇몇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 복장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2·8독립선언 장소인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지금은 당시 건물은 사라지고 현대식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일본어를 일본인처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덕수는 일찌감치 ‘기무라 겐지(木村謙二)’라는 일본인 이름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던 요원이었다. 1월 27일 장덕수는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의 국제 항구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배에 올랐다. 나가사키를 경유해 도쿄에 도착한 날은 2월 3일경. 도쿄에서는 중국 유학생 유모(劉某)로 위장해 간다구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도쿄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유학 시절 자주 찾아가 돈을 내고 책을 빌려 보았던 간다구(神田區)의 서점가도 그대로였다. 그는 1916년 7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2등으로 졸업한 후 곧바로 귀국했다가 상하이로 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장덕수는 신주쿠에 있는 모교 와세다대를 찾았다. 그는 재학 시절 정치경제학과가 차세대 정치인을 양성하고자 의욕적으로 추진한 모의국회와 웅변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탁월한 언변으로 ‘조선인 대웅변가’ ‘털보 웅변가’라는 유명세까지 치렀다. 장덕수는 수염이 많아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 사이에 ‘털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감회도 잠시, 장덕수는 서둘렀다. 조용운을 만나기 위해 우편함을 통해 비밀 접선을 시도했다. 동제사 요원들은 비밀을 맹약하고, 간부 상호 간에는 암호를 사용해 왕래했다. 모두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12년에 결성된 비밀결사조직 동제사는 그 전체 조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다. 상하이에 있는 동제사 본부는 이사장(신규식)과 총재(박은식), 몇 명의 간사가 지휘했다. 그 아래로 사장과 간사를 둔 지사(분사)가 중국의 베이징(北京)·톈진(天津)·만주·노령 지역, 미국 등 구미 지역, 일본 등지에 설치돼 있던 정도로만 알려졌다.
또 동제사는 교육기관인 박달학원을 통해 독립운동 인재들을 배출했다. 동제사와 박달학원에서 배출한 학생들은 10년간 100여 명에 이르렀다.(‘특고경찰관계자료집성·特高警察關係資料集成’·제12권)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해 정규 군사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동제사를 통해 문무를 겸비한 독립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됐다. 전성기에는 동제사 회원 수가 300명에 달했다.(민필호, ‘예관 신규식선생 전기’)
장덕수 역시 1917년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 요원 여운형의 소개로 신규식을 만나 동제사 식구가 됐던 터다.
도쿄에서 암호를 사용해 만난 두 사람은 시바(芝)공원 내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밀담을 나눴다. 조용운이 장덕수에게 말했다.
“내가 도쿄 유학생 측에게 권유한 결과 학생들이 드디어 오는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정했소.”(‘고등경찰요사’)
조용운은 그간 도쿄 유학생들과의 접촉과 움직임을 상세히 장덕수에게 전달했다. 장덕수는 동제사 수장으로부터 받은 밀지의 내용처럼 일이 무탈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적이 안심했다.
○ 고육계(苦肉計)로 일본 경찰을 속이다
두 사람은 도쿄 거사의 핵심 역할을 하는 유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투사적 면모가 물씬 나는 최팔용(1891∼1922)을 오랜만에 만난 장덕수는 기뻤다.
와세다대 동문인 장덕수와 최팔용은 여러모로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장덕수는 재일 유학생의 대표 조직인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논객으로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1916년 초에는 도쿄에서 중국·대만, 베트남 유학생들과 함께 결성한 국제적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의 주요 구성원으로도 활동했다.
정치경제학과 후배인 최팔용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최팔용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학지광’의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고, 장덕수가 귀국한 뒤에는 신아동맹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둘 다 성격도 화통했다. 장덕수는 믿음직한 동문 최팔용으로부터 그간의 활동 상황을 들었다. 최팔용이 전하는 경과는 이랬다.
1919년 1월 6일 오후 7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학우회 주최 웅변대회가 열렸다. 도쿄에 거주하는 600여 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참여했다. 겉으로는 웅변대회였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을 모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갈 대표(임시실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최팔용(와세다대), 백관수(세이소쿠영어학교), 윤창석(아오야마학원), 서춘(도쿄고등사범학교), 김철수(게이오대), 김상덕(세이소쿠중학교), 이광수(와세다대), 송계백(와세다대), 이종근(도요대), 최근우(도쿄고등사범학교), 김도연(게이오대) 등 모두 11명이었다. 그렇게 도쿄 2·8독립선언의 씨가 뿌려졌다.
그런데 유학생들의 낌새를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이 강화됐다. 특히 11명의 대표는 경시청(警視廳)의 갑호(甲號) 요시찰 대상에 올라 꼼짝도 못 할 정도로 미행이 따라붙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것도 적지인 일본의 심장부 한복판에서 학생 신분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게 결코 용이한 게 아니었다.(김도연, ‘나의 인생백서’)
그해 1월 중순, YMCA 2루(樓) 북사실(北使室). 11명의 유학생 대표가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돌리기 위해 고육계를 썼다. 대표자 내부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대표들 중 핵심이자 중진인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이 탈퇴 성명을 발표했다. 작전이 먹혀들어 갔다. 일본 경찰은 탈퇴하지 않은 나머지 대표들에게 감시망을 붙였다.(‘앞길·19호’, 1937년 7월 5일자)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등은 ‘학우회’나 ‘유학생친목회’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데 뜻을 모으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대표들은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일본 국회,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각 언론사 등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이광수가 썼다.
최팔용의 활약을 들은 장덕수는 와세다대 동문, 그리고 자신이 활동했던 조선학회와 신아동맹당 멤버들이 독립선언의 선봉으로 나섰다는 점에 고무됐다. 물론 이 일에는 동제사 요원 조용운의 배후 역할도 작용했다.
○ 상하이에 나타난 윌슨 대통령의 특사
장덕수는 최팔용에게 상하이에서 벌어진 최근 소식을 전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4년 만인 1918년 11월 11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상하이는 축제 분위기였다. 거기다가 11월 말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개인 특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해 승전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중국상공회의소, 중국YMCA 등이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오찬 자리에서 중국인들에게 연설했다.
“파리강화회의는 각국 모두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그 영향도 또한 큰 것이다. …피압박 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해방을 도모하는 데 최적의 기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말하고, 그 해방을 도모해야 한다.”(이 연설회에 참석한 여운형에 대한 경기도경찰부의 ‘피의자신문조서(제1회)’, ‘몽양여운형전집·1’)
말로만 듣던 민족자결주의를 미국 대통령 특사가 직접 밝히면서 약소민족 해방을 설파한 것이다. 그리고 승전국의 일원이면서도 일본에 예속된 상황인 중국에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이를 주장하라고 조언하지 않는가.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이 모임에 참석해 감동을 받은 여운형은 중국 지인을 통해 크레인을 만났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해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겠다. 당신의 원조를 요청한다.”(여운홍, ‘몽양 여운형’)
여운형의 요청에 ‘민족자결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크레인 역시 긍정적으로 답했다. 여운형의 발 빠른 행동에 맞춰 동제사의 젊은 요원들은 즉시 대표성을 갖추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크레인을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두 곳에 최종 전달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파견키로 했던 것이다.
또 한국 대표인 김규식의 파리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국내외에서 대규모의 독립운동과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에서의 대대적인 독립운동은 가장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큰 선전이 될 것이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이 1차 조용운 파견에 이어 2차로 장덕수까지 파견한 이유이기도 했다.
장덕수로부터 “여운형과 함께 직접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는 말을 들은 최팔용은 감격했다. 파리에 한국 특사가 실제로 파견됐다는 소식에는 조국이 마치 독립이나 된 듯이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장덕수는 또 일본 유학생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전했다. 국내를 비롯해 중국 만주 쪽에서도 거사가 도모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장덕수가 상하이에서 도쿄에 잠입하라는 밀지를 받을 무렵인 1919년 1월 21일, 중국 만주의 펑톈(奉天)에서 활동 중인 동제사 요원 정원택(1890∼1971)에게도 밀지가 전해졌다. 박달학원 출신인 정원택은 비밀서류임을 알아차리고 공원 으슥한 곳으로 가서 개봉했다.
‘방금 구주전란(歐洲戰亂·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을 제창하며 파리에 평화회(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니 약소민족이 궐기할 시기다. 상해에 주유(住留)하는 동지들이 미주의 동지와 국내 유지(有志)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며, 일면으로 파리에 특사를 발송 중이라.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48명.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에 게재됐다.
‘선생님’으로 모시는 동제사 수장 신규식의 밀지를 읽은 펑톈의 청년 요원 역시 최팔용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울렁거렸음을 느꼈다. 상하이로 망명해 유학하던 시절, 신규식의 지원을 받은 정원택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이었다. 정원택은 생계를 위해 하던 일을 모조리 정리한 후 길림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처럼 동제사의 지령은 각 지역 요원들에게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었다. 국내의 애국지사 월남 이상재와 의암 손병희에게도 밀서를 전하기 위해 요원 방효상과 곽경이 움직였다.(방효상과 곽경은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돼 혹독한 고문을 받아 곽경은 옥사하고, 방효상은 폐인이 됐다) 이와 별도로 동제사 요원 선우혁은 평북 선천(宣川)의 목사 양전백, 정주의 이승훈, 평양의 길선주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과 거사 자금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국내외 각지에서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도쿄 유학생들도 동제사 요원이 도착하기 전부터 세계정세에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었다.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절박한 마음이 유학생들 사이에 형성돼 있었다.
최팔용은 1918년 12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발간하는 영자신문(The Japan Advertizer)의 기사(‘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와 일본 매체에 간간이 소개되는 독립운동 소식을 보며 한껏 고무돼 있던 참이었다. 재미동포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고, 이승만 등 대표단이 파리로 향한다거나 미주 동포들이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등의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최승만, ‘나의 회고록’)
미국과 중국의 해외동포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일본 유학생들만 더 이상 가만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최팔용은 해외 각지에서 동포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중 일본 유학생들의 역할이 제일 클 것이라는 사실에 더 한층 결의를 다졌다.
상하이에서 밀파된 2명의 비밀요원과 도쿄 유학생들의 만남은 적국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는 모의에 일단 성공했다. 이들은 2월 8일의 그날까지 모든 일정을 꼼꼼히 챙겼다. 도쿄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포하는 최전선 기지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운의 정체는 2·8독립선언 운동사 가운데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에는 조용운을 동제사의 핵심 조직원인 조소앙으로 파악하고, 그가 도쿄에서 최팔용과 장덕수를 접선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동제사 요원 정원택이 남긴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에는 조소앙이 1919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중국 지린(吉林)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소앙의 도쿄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화사학연구소 강영심 연구원은 조용운을 조소앙과 함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친동생 조시원(조용원)으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