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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장선희]진심 없는 ‘사과’의 쓴맛

입력 | 2018-03-05 03:00:00


장선희 문화부 기자

“사죄할 때 허리는 100도 숙이고, 속으로 20초를 세요. 그럼 뭐, 거의 비난받을 일이 없죠.”

딸에게 과거 상처를 준 적이 있는 현직 국제 변호사, 직장에서 성희롱으로 고소당한 회사원…. 몇 해 전 일본에서 인기를 끈 코미디 영화 ‘사죄의 왕’(2013년)에는 사과하는 방법을 몰라 쩔쩔매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몇 가지 기술만 있으면 사과할 때 바닥에 머리를 조아릴 필요 따위는 없다’며 TV 광고 중인 도쿄의 사죄센터라는 곳을 찾는다.

여러 캐릭터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들이 폭행 사건에 연루되며 곤란한 나날을 보내던 일본의 국민 배우 난부 데쓰로(다카하시 가쓰미)다. 사죄센터 대표이자 자타 공히 사과의 달인이라고 칭하는 구로시마(아베 사다오)는 그에게 공개 석상에서 사과를 할 때의 표정과 말투, 심지어 허리를 굽히는 시간까지 조언한다. 하지만 당장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뿐, 진짜 미안한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잠깐의 연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 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던 그의 아들까지 “이런, 미안하게 됐습니다”라는 영혼 없는 사과로 공분을 사며 사태 해결은 산으로 간다.

‘허무 개그’ 식의 B급 유머가 판치는 코미디 영화이지만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어릴 때 멋대로 커서 사과할 줄을 모른다”고 털어놓던 영화 속 20대 캐릭터처럼 크고 작은 잘못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을 비꼬고, 나아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제대로 사죄하지 못하는 일본의 문제점까지 두루 짚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이런 유의 블랙 코미디가 당시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며 22억 엔(약 220억 원)의 흥행 수익을 기록한 것은 이런 세태에 공감한 이가 적잖았기 때문이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도…. 기분이 나빴다면, 그 점은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최근 성폭력 고발 캠페인인 ‘미투’의 한 가해자를 취재할 일이 있었다.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피해자의 말을 전했더니 그는 시종일관 황당해하며 이미 저렇게 사과했다고 강조했다. 그의 사과가 별로 와 닿지 않는 건 ‘고의가 아니었고’ ‘기분이 나빴다면’ 등 너무 많은 단서가 달렸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사과가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됐다”는 피해자의 말이 깊이 공감됐다.

‘미투’ 캠페인이 확산되며 잘못된 행위가 폭로될수록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과도 덩달아 쏟아진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더 싸늘하다. 역시 ‘잘못인 줄 모르고’ ‘세월이 많이 지난 일로’ ‘당시에는 별 문제의식이 없었고’ 같은 자기변명이 주를 이루는 탓이다. 사과 기자회견을 ‘리허설’까지 했다는 연극계 원로, 성희롱 발언 피해자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폭로) 글을 지워줬으면 한다”는 ‘사과 문자’를 보냈다는 영화감독을 지켜보며 ‘사죄의 왕’ 속 난부 데쓰로의 모습이 스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나마 데쓰로는 영화 막바지, 정작 사과를 해야 할 곳은 카메라 가득한 기자회견장이 아니라 아들의 폭행 사건 피해자 앞이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그는 피해자 앞에서 사죄 컨설턴트의 ‘20초 룰’ 같은 기술적 조언 대신 일본의 아주 오래된 사과 방식인 ‘도게자’를 택한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뿐이다. ‘미투’ 폭로에 따른 사과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길, 이제라도 진정성 있는 사과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