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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지옥… ‘외칠 수 없는 미투’에 우는 지적장애 여성들

입력 | 2018-03-07 03:00:00

범죄 신고-입증 어려운 지적장애
성폭행 피해 장애여성 76% 차지… 대부분 기소조차 안된 채 종결
호의뒤 흑심 눈치못채 성폭행 노출… 장애 고려한 피해조사 시급




고교생 A 양(17)은 지난해 8월 같은 반 B 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B 군은 나체 상태인 A 양의 동영상까지 찍었다. A 양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B 군은 범행 뒤 “피해 사실을 알리면 네 어머니를 중국에 팔아넘기겠다”고 A 양을 협박했다. 나체 동영상에 B 군의 협박이 아니었더라도 A 양은 침묵했을지 모른다. 지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범행은 담임교사가 A 양을 상담하던 중 이상한 낌새를 채면서 드러났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이 일사천리로 처리될 줄 알았지만 경찰도 난감했다. A 양은 범행 장소와 시간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범행 날짜를 말했다가 번복하기를 되풀이했다. 결국 경찰은 불완전한 A 양의 진술을 토대로 범행 장소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B 군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B 군은 경찰과 검찰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다. 피해 진술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법은 지적장애인 A 양에게 너무 높은 벽이었다. 결국 B 군은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몸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A 양의 힘겨운 투쟁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성폭력과 성추행을 고발하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문화·예술계와 교육계, 정계 등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미투’를 외치고 싶어도 외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장애 여성이 대표적이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권력형 성범죄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적 약자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지만 장애 여성은 사각지대에 있다.

여기엔 성범죄 피해 장애인의 상당수가 지적장애인 점과 무관치 않다. 2016년 전국 성폭력 상담소에 접수된 피해자의 장애 유형을 분석한 결과 76.4%가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하거나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성범죄자들에겐 범행을 은폐하기 손쉬운 상대로 치부될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지적장애인들은 타인이 호의를 베푸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비장애인에 비해 더 쉽게 성폭력에 노출된다. 20대 초반의 C 씨(지적장애 2급)는 지난해 같은 동네에 사는 60대 후반인 D 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D 씨는 평소 C 씨에게 늘 반갑게 인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좋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범행 당일 C 씨는 “우리 집에 놀러가자”는 D 씨의 말에 아무 경계심 없이 따라갔다가 변을 당했다. D 씨의 호의는 성범죄를 위한 ‘덫’이었던 셈이다.

이희정 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강간은 폭행과 협박이 수반돼야 법정에서 처벌받는데, 지적장애인을 유인 및 회유해 성폭행한 경우 ‘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는 가해자의 진술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장애인 성폭행 사건을 다룰 때 피해자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적장애인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서술하기 힘든 만큼 범죄 정황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지적장애인 중에는 범행 시간과 장소를 특정하지 못하는 대신 피해를 당한 날 본 드라마가 무엇인지, 피해 전후로 방문한 곳이 어디인지 등 범행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할 진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수사기관이 이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장애인 대상 성범죄 기소율은 하락하는 추세다. 2013년 45.3%에 이르렀지만 2014년부터 3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법학과 교수는 “기소나 판결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주목받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한다”며 “2011년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실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큰 화제를 모으고, 2012년 성폭력처벌법 개정으로 장애인 대상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2013년에 일시적으로 기소율이 올라갔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성폭력 형량이 높아지면서 법원이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는 점이 장애인 대상 성범죄 기소율 하락의 원인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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