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꾼
한 여성을 업고 가는 남성의 모습이 담긴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한반도는 산이 많아 강과 시내도 흔하다. 조선시대에는 뱃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문제는 다리가 놓이지 않고 깊이도 애매한 시내였다. 걸어서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이끼에 미끄러지면 물에 빠져 낭패를 봤다. 더구나 여인들은 남 보는 데서 신을 벗어 맨발을 드러낼 수 없었고, 양반 남성들 역시 체면 때문에 신 벗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길손을 등에 업고 시내를 건네준 뒤 품삯을 받은 이들이 월천꾼이다. 섭수꾼(涉水軍)이라고도 했다. 가마나 무거운 짐도 옮겼다. 목말을 태우기도 했다. 사람의 직업과 새를 연관지어 노래한 ‘백조요(百鳥謠)’는 ‘황새란 놈은 모가지가 기니 월천꾼으로 돌려라 댕그랑 땅 댕그랑 땅’이라고 월천꾼을 황새에 빗댔다.
연행, 사행의 월천꾼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1682년 일본으로 통신사행을 다녀온 홍우재는 ‘동사록’에서 물살이 센 아부천과 대정천을 지날 때 수백 명의 일본인 월천꾼이 시내 가운데 줄지어 서서 좌우에서 부축하며 건네주었다고 했다. 1828년 청나라로 연행을 다녀온 박사호도 압록강과 요동의 여러 시내를 건널 때 인근 마을에서 동원된 월천꾼의 등에 업혔다.
월천꾼은 발이 깨질 듯한 얼음물에 견디기 위해 물이 새지 않고 어깨까지 오는 가죽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1804년 연행을 다녀온 이해응은 가죽바지를 입은 청나라 월천꾼 수십 명이 시내를 가로막은 얼음덩이를 부수고 평지를 오가듯이 하며 사람과 말을 건네주었다고 썼다.
월천꾼과 함께 물에 빠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박사호는 얼음에 미끄러지면서 주저앉는 월천꾼의 목을 끌어안고 당황하며 함께 물에 빠졌다. 동료들은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1868년 금강산 유람을 떠난 권숙도 월천꾼에게 업혀 불어난 시내를 건너다가 물이 목까지 차올라 옷이 다 젖었던 경험을 기행가사에 남겼다. 숙종 때는 접반사(接伴使·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벼슬)의 차비관(差備官)을 맡은 윤두만과 월천꾼이 함께 물살에 휩쓸려 죽었다.
정조 때에는 물이 불어난 내를 월천꾼을 쓰지 않고 무리하게 건너다가 조정에 급히 보고할 문서를 빠뜨려 잃어버린 사건도 일어났다. 정조는 해당 지방관을 파직했다. 변방의 급보가 자주 지나는 삼탄(三灘)에서는 부역으로 월천꾼 일을 하게 된 인근 백성들이 고생을 견디기 어렵게 되자 비용을 모아 다리를 놓기도 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