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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모의 공소남닷컴] 통쾌하게 풀어낸 19세기의 ‘미투운동’

입력 | 2018-03-09 05:45:00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안나(왼쪽)가 여성 문학동호회 회원들과 만나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는 장면. 안나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잡지 레드북에 연재해 대박을 터뜨리며 일약 문단의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사진제공|바이브매니지먼트


■ 뮤지컬 ‘레드북’

숨겨진 재능 ‘야설쓰기’로 대박난 안나
“방에서 봅시다” 흑심 품은 평론가 존슨
현실속 미투운동도 ‘레드북’처럼 끝나길…


뮤지컬 레드북을 보는 내내 유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딱딱해졌습니다.

돈 없고 남자 없는 비참한(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삶을 살던 안나는 변호사 브라운을 만나 자신의 재능(일종의 야설쓰기)을 뒤늦게 발견하게 됩니다.

여장남자 로렐라이가 이끄는 여성 문학동호회에 가입한 안나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자전적인 야한 소설을 쓰게 되죠. 이게 대박을 치게 되지만 남성위주의 사회는 안나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이자 문학계의 파워맨이 “당신의 (야한) 소설에 매료되고 말았소. 우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조용한 방에서 나누어 봅시다” 하며 안나를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평론가의 이름이 범상치 않습니다. 빅 존슨. ‘존슨’이 영어권에서 남성 성기의 비속어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작자의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역시 그랬습니다.

요즘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 캠페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제작사가 미투를 예상하고 이 작품의 라이선스 공연을 시작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마치 시류와 짠 듯 딱 들어맞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이, 쑤셔오듯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물론 메시지만 강조된 작품은 아닙니다. 레드북은 굉장히 재미있고, 유쾌하기까지 한 작품이거든요.

뮤지컬 ‘레드북’에서 안나 역을 맡은 유리아. 사진제공|바이브매니지먼트


안나 역을 맡은 유리아는 연기호흡이 많이 유연해졌습니다. 코믹연기는 본 기억이 없는데, 무리 없이 잘 소화했습니다. 관객이 웃을 수 있는 타이밍을 정확히 읽고 있었거든요. 노래는 뭐 워낙 잘 하는 배우이고요.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고 하던가요.

로렐라이 역의 홍우진과 도로시 역의 김국희 배우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두 사람이 이 작품의 좌우 날개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잘 달리는 타조’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홍우진의 로렐라이가 뛰어나, 이 작품의 제목을 ‘뮤지컬 로렐라이’라 불러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유리아와 도로시가 처음 만나 벌이는 ‘사마귀 장면’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아마 김국희란 배우가 아니면 이 정도로 맛을 살려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뮤지컬 ‘레드북’에 등장하는 세 명의 신사들. 사진제공|바이브매니지먼트


브라운을 포함한 세 명의 신사들도 흥미로운 캐릭터였죠. 허세와 과장에 쩐 신사들이지만 밉지 않습니다. 이들의 폴짝폴짝 뛰는 걸음새는 누가 고안했을까요. 광화문에서 커피 한 잔 사고 싶습니다.

첫 15분을 견딜 수 있다면 나머지 2시간 25분이 만족스러울 수 있으실 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어느 순간 ‘훅’ 빨려드는 뮤지컬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컬링과 같군요!!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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