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정치-권력지형 흔드는 미투운동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높은 성취욕과 자신감을 가진 여성.’
2006년 ‘알파걸’이라는 미국의 신조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하버드대 아동심리학자인 댄 킨들런 교수가 10대 소녀들의 변화상을 담아 만든 용어였다.
1986년 부천경찰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 1992년 서울대 신모 교수 성희롱 사건 등을 계기로 이어진 여성운동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양성평등은 상당 부분 진전을 이뤘다는 인식이 퍼졌다. 반면 뛰어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위기의식은 도드라졌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꽤 오랜 기간 알파걸 신화 속에 살았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착각이었다. 한국 여성의 성평등 의식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사회구조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판 미투운동은 역설적으로 ‘알파걸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알파걸은 착각이었다
주부 손지민 씨(35)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아이’였다.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고 미술과 체육 시간에도 학우들보다 돋보였다. 2007년 명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침대 맡에서 셰릴 샌드버그, 힐러리 클린턴의 책에 밑줄을 그으며 남다른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성의 성평등 의식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사회구조는 전근대에 가까웠어요. 남자 상사는 ‘비키니 입으면 예쁘겠다’는 말을 예사로 내뱉었고, 회식 후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들어야 했죠.”
그는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음담패설 등 여성을 비하하는 분위기와 말대답을 하면 별종으로 취급하는 권위의식에 크게 실망했다”고 토로했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홍모 씨(33)도 비슷한 무력감을 느꼈다. 사회 핵심 구성원인 4050세대 남성들 일부는 예사로 여성 동료의 외모를 품평하고 비교했다. 군대문화가 조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알파걸 신화가 굴레로 작용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10년 차 기자인 이모 씨(34)는 “‘여성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왜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알파걸이라는 굴레를 악용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 ‘강남역’ ‘촛불’ ‘SNS’
가정에서의 성역할 갈등도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2세, 5세 자녀를 둔 직장인 김유경 씨(37)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전통 질서에 따라야 했다. 똑같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명절에 기차표를 끊거나 부모님 생신을 챙기는 일은 늘 김 씨의 몫이었다.
그는 “사회가 현대여성과 전통여성의 불리한 부분만 떠맡기고선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았다”며 “이따금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여러 문제가 겹치며 여성들 사이에 ‘뭔가 잘못됐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사회문제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여성 대통령의 탄생과 일부 여성 리더의 신화에 보편적 여성문제가 가렸기 때문이다.
2016년 ‘여혐’과 ‘남혐’ 논란 분위기를 타고 이들은 결속을 다졌다.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 살해사건을 기점으로 들끊던 분노가 폭발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살아남아서다행이다’라는 연대의 해시태그가 넘쳐났다. 한샘 성폭력 사건이 처음 알려진 네이트 판 게시판, 직장인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 등 온라인 공간에는 성폭력 관련 상담글이 쏟아졌다.
온라인에서 연대한 이들은 같은 해 말 촛불집회를 통해 한 단계 성장했다. 뭉치면 잘못된 정치·사회 현상을 직접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웠고, 이때의 경험은 미투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강남역 사건으로 일상의 공포를 자각하고 촛불집회를 통해 실질적 변화를 절감한 알파걸들이 SNS를 무기로 미투운동을 주도했다”고 분석했다.
○ 정치권력 지형까지 흔들
전문가들은 “미투는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의 운동”이라고 입을 모은다. 큰 틀에선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대중운동이지만 어디서 또 폭발할지, 어디로 향할지,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은 안갯속이란 것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형성된 진보 진영 우세의 정치 지형, 친문(친문재인)-비문(비문재인) 등 여권 내부의 권력 지형에도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판 내부의 ‘주군(主君) 문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인 전 지사 피해자와 지난해 대선 경선 캠프에서 근무한 이들은 8일 캠프 내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이 교수는 캠프 인사들이 문제를 알고도 묵살했던 배경에 대해 “현재 정치판은 선수가 무너지면 캠프 식구 모두가 일자리를 잃는 구조”라며 “이로 인해 맹목적 순종과 비민주적 분위기가 만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앞으로 (비서를 수족 부리듯 하는) 가신 구조의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이 지점이 미투운동의 본질이자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바뀔 것이란 의견도 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인을 검증할 때 주변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잣대로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성 관련 잡음에 휘말린 전력이 드러날 경우 공천에서 탈락할 공산이 크다.
○ ‘펜스 룰’은 답이 아니다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애초에 여성과 문제 될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이른바 ‘펜스 룰’을 따르려는 남성이 늘고 있다. 펜스 룰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많은 남성들은 ‘펜스 룰을 지키는 게 속 편하다’고 푸념한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이모 씨(40)는 “혹시 모를 무고에 대비해 펜스 룰을 지키고 있다”며 “타인(여성)의 평등과 기회 보장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40대 후반 조모 씨는 “남성들 사이에서 ‘집무실 문은 활짝 열고, 남성과 여성 직원의 회식 장소를 따로 잡으라’는 매뉴얼이 돌고 있다”며 “농담 섞인 내용이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펜스 룰은 미투운동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속 가능한 미투운동을 위해선 남성들의 참여와 지지가 필수적”이라며 “이를 위해선 ‘위드유’를 외치는 남성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드유’를 지지하는 한주석 씨(39)는 “얼마 전 아내가 직장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담을 듣고선 소스라치게 놀랐다”며 “먼 나라 일인 줄 알았는데 성폭력 이슈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했다. ‘한국 남자가 부끄러운 한국 남자’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미투를 지지하는 남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각계 핵심 위치에 오른 민주화세대 남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운동권이었다가 1990년대 초반 제도권에 진입한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사회·문화적으로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인다는 평가다.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3040세대와 달리 젠더 감수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안 전 지사를 비롯한 미투운동 가해자 대부분이 이 세대에 속한다.
한 수도권 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성역할과 유교질서가 동시에 무너지는 현실에서 기성세대 남성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다”며 “미투운동이 성공하려면 이들의 적응을 돕고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판 앙시앵 레짐 종언
전문가들은 미투운동이 새 시대를 향한 물꼬를 텄다고 입을 모은다. 사안이 심각하고 비교적 명확한 여성문제가 ‘한국판 앙시앵 레짐(구체제) 종언’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실제 검찰과 문화계 내 성폭력 폭로로 시작한 미투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번지고 있다. 홍익대 커뮤니티에는 군대식 신입생 길들이기 관행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한 언론사 직원은 상사의 언어폭력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젠더문제에 비교적 무감한 1020세대는 미투운동을 여성문제가 아닌 계급문제로 받아들인다는 시각도 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미투운동은 여성문제뿐 아니라 계층갈등, 권위주의, 성차별 등 다양한 구태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고 있다”며 “한국판 ‘앙시앵 레짐 종언’의 성격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미투운동은 계급운동의 색깔이 짙다는 점에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사회변혁 운동으로 번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김숙영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외신에서 “한국은 인종문제가 없는 대신에 계급갈등이 심각한 편이다. 이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저임금 노동자나 청년들은 미투운동을 계급운동의 연장선으로 본다”며 “주류 남성 중심의 각종 억압에 맞서 성별을 뛰어넘은 결속이 이뤄지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설 snow@donga.com·이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