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회식 진한 감동 안긴 한민수
한국 장애인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주장 한민수가 10일 강릉 하키센터에서 열린 일본과의 예선 B조 1차전에 출전한 모습. 수비수인 그는 온 몸을 던지는 플레이로 팀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헬멧에는 삶의 버팀목인 두 딸과 아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태극마크를 단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슬로프 위에 놓인 줄을 잡았다. 주로 두 팔과 한쪽 다리의 힘에 의지한 채. 하체가 제대로 몸을 지지하지 못하므로 사실상 두 팔에 의지해 매달리듯 올라야 했다.
느렸고 절뚝였다. 균형을 잃고 기우뚱 넘어질까 우려하는 시선들, 침 넘기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긴장감 속에 그의 ‘생애 최고의 등반’이 계속됐다.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본 건 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발을 내딛는 그 모습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눈물을 흘렸다. 기어코 성화 점화대 앞에 도착해 그가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하게 웃는 순간 가족들은 “아빠 최고!”라고 외쳤다.
한민수는 아이스하키 헬멧을 썼다. 등에 멘 성화봉의 불꽃이 바람에 날려 머리에 옮겨 붙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헬멧에는 두 딸(소연, 소리)과 아내(민순자) 등 가족의 이름이 있었다. 한민수는 “성화를 성공적으로 옮기자 우리 딸들이 너무 좋아했다. 팀 동료의 자녀들까지 멋있다고 한다. 내가 아이들한테 인기를 좀 얻은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장애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이 가족들이다. 두 살 때 침을 잘못 맞은 뒤 관절염을 앓았다. 목발을 짚고 다녔던 그는 30세 때 무릎에 골수염이 생겨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때였고, 첫아이는 생후 4개월이었다. 한민수는 “다리를 절단한 상실감이 컸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휠체어농구와 역도 등을 하다가 2000년부터 아이스하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9일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회식에서 등 뒤에 성화봉을 맨 채 한 가닥 줄에 의지해 가파른 슬로프를 오르고 있는 한민수. 평창=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슬로프 등반 방식도 개회식 하루 전에야 확정됐다. 당초 한민수는 슬로프 3분의 1 정도를 계단을 이용해 오르기로 돼 있었다. 이문태 패럴림픽 개회식 총감독은 “무릎 구부리기가 자유롭지 않은 의족을 차고 경사가 급한 계단을 오르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며 줄을 잡고 오르는 방식으로 변경한 이유를 말했다. 개회식장 슬로프 길이는 약 42m이며, 경사도는 39도다. 한민수가 성화를 운반한 거리는 약 14m다. 한민수는 “부담이 컸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성공해 다행이다. 많은 국민이 감동을 받으셨다고 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11일 체코와의 2차전에서도 연장전에 터진 정승환(32)의 결승골에 힘입어 3-2로 이겼다. ‘빙판 위의 메시’ 정승환은 한쪽이 골을 넣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서든데스’ 방식으로 치러진 연장전 시작 13초 만에 골을 넣는 등 2골 1도움을 기록했다. 2연승을 달린 한국은 4강 진출이 밝아졌다. 극적인 승리에 한민수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내 별명이 ‘울보’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가족들을 얼싸안고 함께 울었다”고 했다. 김정숙 여사는 이날 한민수 선수 가족들과 함께 경기를 본 뒤 “아버지가 자랑스럽네요”라며 축하했다.
18년간 아이스하키 선수를 해온 한민수는 “올림픽이 끝나면 지도자의 길을 준비할 생각이다. 마지막 올림픽에서 메달 목표를 이룬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릉=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