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법무법인 충정 업무환경개혁 이사
1996년 여름 원어민 영어교사 오리엔테이션에서 한국에 온 영어교사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곤 했다. 놀랍게도 맥주는 콜라나 사이다보다 더 쌌다. 저렴하게 마시고 싶다면 부득이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근데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그냥 있어서 마셨다. 소주의 존재도 알게 됐다. 어느 날 술집 화장실에 갔다 오다가 소주를 마셔 취한 아저씨에게 붙잡혔다. 그는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억지로 자리에 앉혀졌고 큰 놋쇠 주전자에 담긴 소주를 따라 줬다. 할 수 없이 ‘치어스’라 말하고 마셨다.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세 명과 몇 마디 어설픈 영어로 대화하다 도망쳤다. 술은 취했지만 우호적이었고 무해한 술고래의 세상을 봤다. 물론 내가 여자였다면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리엔테이션 말미 저녁 식사에선 모두 종이팩 주스처럼 생긴 음료를 받았다. 내용물은 주스가 아니라 소주였다. 독한 술(1990년대에 소주는 도수가 높았다)이 이렇게 저렴한 포장으로도 팔리는구나. 호주에서는 술의 도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한국처럼 저렴하게 술에 취할 수 없다. 호주에서는 ‘죄악세’를 매겨서 음주, 흡연은 비싼 취미다.
1997년 한 여자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할 때 경북 경주로 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다. 점심을 먹을 때 교사들에게는 캔맥주를 나눠 줬다. 나도 캔맥주 하나를 받았지만, 나중에 마시려고 가방에 넣었다. 수학여행이지만 근무시간이어서 학생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술을 마실 심적 여유가 없었다. 내 생각을 동료 교사들에게 설명했으나 많은 이해를 받지는 못했다.
훗날 다른 학교에서 동료 교사에게 가끔 집에서 맥주를 혼자 마신다고 말했더니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제일 불쌍하고 한심한 모습이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내게는 단체생활의 습관이 깊숙이 스며들지 않았다. 최근 ‘혼술’이란 신조어를 들어보니 술 문화가 바뀐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서 일하며 회식 시간에 나는 자주 술을 강요받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술을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안쓰럽다. 한번은 회식에서 테이블 밑에 빈 그릇을 두고 소주를 모두 그곳에 버렸다. 그 대신 물을 소주인 양 마시는 척을 했다. 강요된 음주 자리에선 이런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몇 년 전에 한 영국인 친구가 한국 맥주를 비판해 꽤 유명해졌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기자였던 대니얼 튜더는 북한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더 맛있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이후 한국인들의 맥주 취향이 바뀌는 시기에 튜더는 지인들과 적절한 시기에 수제맥주 양조장을 세웠다.
2012년 건강 문제로 4개월간 술을 마시지 못했다. 의사는 술을 조금 마시는 것은 괜찮지만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또 독한 술은 아예 피하라고 했다. 그래서 술을 취하려고 마시기보다는 맛을 음미하며 마신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맥주와 막걸리는 품질과 맛이 크게 좋아졌다. 한국의 술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시기인데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술을 자제해야만 한다. 우리 법무법인에는 억지로 술을 마시는 회식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