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지현 사회부 기자
1996년 고등학생일 때는 북한 무장공비가 잠수함을 타고 동해까지 내려왔다. 당시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커녕 인터넷도 도입 초기여서 TV뉴스에 나오는 ‘공비 추적 중’이라는 말에 많이들 떨었다.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느냐”는 정치인도 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간첩이 있었다.
대학에 다니던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평양 순안공항에 발을 딛는 김 대통령의 모습이 방송에 나오자 우는 학생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노래 부르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통일이여 오라”가 현실이 되는 것이냐며 감격했다. 하지만 그 이후 북한은 핵을 만들었다. 남북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통일은 오지 않았다.
통일을 강요하지도 않고 이념적이지도 않다. 지난해 5월 대선 때에는 후보를 낸 5개 정당을 돌아다니며 “남북 젊은 세대의 생각이 너무 벌어졌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북한 제대로 알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득하고 다녔다. 구자현 통일문화네트워크 대표는 “사회 소외계층 봉사활동을 하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미래지향적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북한의 젊은 무역상들을 접해본 한국인들은 “당 중앙이 배급을 제대로 하지 못한 1980년대 이후 성장한 이른바 ‘장마당’ 세대는 남한 정부의 공짜 돈이 아니라 평등한 비즈니스 거래를 원한다”고 입을 모은다. 몇 년 동안 탈북자 연구 프로젝트를 해온 이숙현 씨(37·여)는 “한민족이기 때문에 서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잘하는 젊은 너와 나, 글로벌 시장에서 놀아보자’는 느낌이 강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맹목적인 통일론은 남북 젊은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구 대표는 “북한에 대한 지식을 넓혀가는 교육 플랫폼으로 ‘통일문화 마스터’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에게 통일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게 중론이어서 ‘하모니 마스터’라고 명칭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온 북한 ‘미녀’ 응원단은 10여 년 전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북한 당국이 우리나라 젊은 세대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셈이다. 남북 관계가 급물살을 탈 것 같다는 희망 섞인 기대가 생기는 요즘이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나라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세대는 계속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통일은 더 이상 ‘소원’이 아닐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