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뮤지컬 ‘레드북’
창작뮤지컬 ‘레드북’의 한 장면. 시대를 앞서간 여류 소설가 안나가 사회적 편견에 맞서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PRM 제공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지는 시대착오적 대사들이 남자배우들 입에서 쏟아진다. 여자는 글을 써도 안 되고, 남편 없이는 재산도 갖지 못하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레드북’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언니들을 위한’ 뮤지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다른 글재주를 지닌 발랄한 안나가 거친 방식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온갖 편견에 맞서 이겨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밀려오는 통쾌함에 만족하는 여성 관객이 많다.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주인공 안나는 여장남자 로렐라이의 도움으로 잡지 레드북(Red Book)에 야한 소설 ‘낡은 침대를 타고’를 연재한다. 입소문을 타며 안나의 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영국 문학시장을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평론가 존슨이 안나를 집으로 은밀히 초대한다. 존슨은 안나에게 소설 리뷰를 호의적으로 써주겠다고 제안하며 겁탈하려 하지만 안나는 이를 거부하며 당당하게 뛰쳐나온다. 빅토리아 시대를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국 사회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향력 있는 문화계 인사의 은밀한 제안을 거절한 안나에게 음란물을 썼다는 사회적 비난과 법적 심판의 위기까지 닥쳐오지만, 특유의 꿋꿋함과 당당함으로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