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정 산업2부 차장
그때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첫해였다. 새 정부 출범 때면 으레 그렇듯 남북 관계에 봄이 올까 하는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박 전 대통령도 당시엔 북한에 적극적이었다. 베이징의 한국 정부기관과 기업들은 100m 경주를 하듯 경쟁적으로 북한을 향해 내달렸다. 그곳에서 느끼는 한반도의 봄은 서울보다 빨리 오고 빨리 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중국에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던 A는 봄이 오려고 할 때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손을 벌렸던 것 같다. 어찌 보면 A를 그렇게 만든 건 남한 사람들이었다.
지난달 취임한 오영식 코레일 사장은 해외남북철도사업단을 신설했다. 지난주 출입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하면 (북측 참가자를) 평양에서 서울로 철도로 모실 수 있다”고 했다.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얼마 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수역의 조업권을 구매하고, 북방한계선(NLL) 해상에 파시(波市)를 열겠다고 했다. 다른 부처도 대북 사업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정부가 바람을 잡아주니 증시에선 남북 경협주가 더 뜨는 듯하다. 건설사들의 북한 인프라 수주 규모가 연간 30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지난해 건설업계가 국내외에서 수주한 총 공사 규모 190조 원보다 많다.
정부가 손을 들고 앞서 나가면 기업과 민간단체가 자연스레 따라가기 마련이다. 백화제방식으로 분출하는 의욕을 통제하지 못하면 협상장의 한국 대표는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후방에선 북한에 뭐라도 퍼줄 준비가 돼 있다고 하는데 전방의 장수가 패를 감추며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을까. 북한으로선 남한 후방에서 주겠다는 제안은 ‘기본 메뉴’일 테고, 거기에 ‘플러스알파’를 달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한쪽은 질서 있는 진퇴를 이행 중인데 다른 한쪽은 전후방이 뒤엉킨 거나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던 2007년에 남북 당국자회담이 55차례 열렸고 39건의 합의서가 도출됐다. 그해 금강산 관광객은 173만 명, 기타 남북 인적 교류가 9만 명을 넘었고 선박 왕래도 1만 회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이듬해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건 남북 관계가 유리그릇처럼 근본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행인 건 문재인 대통령이 아직까진 협상의 운전대를 꽉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느꼈던 한반도의 봄이 온 듯 만 듯 지나가고 바로 추운 겨울이 왔듯 남북 관계가 어디로 향할지는 항상 미지수다. 다시 겨울이 오면 그동안 나왔던 제안과 의욕은 누군가의 이력서에, 어떤 정부의 백서에, 그리고 선거 벽보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남북 정상회담이 두 번 열렸지만 우리 손에 남은 건 기록뿐이듯 말이다.
고기정 산업2부 차장 tou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