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 1942∼2018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14일 오전(현지 시간) 영국 케임브리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스티븐 호킹 박사가 2007년 보잉 727 항공기를 개조한 무중력 훈련 장비에 탑승해 무중력을 체험하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
우주의 탄생과 진화를 연구하는 우주론과, 양자역학-상대성이론의 통합을 꿈꾸는 양자중력 등 현대 물리학계를 선도해온 호킹 박사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정통 이론물리학자이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즐긴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꼽힌다.
1942년 영국에서 태어난 호킹 박사는 21세인 1963년 전신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료진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불운한 질병이 그를 거장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장은 “호킹 박사와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낸 동료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며 “케임브리지대 대학원 시절 호킹 박사는 그리 특출하지 않았지만 발병 이후 오히려 연구에 더 집중하면서 놀라운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2007년 보잉 727 항공기를 개조한 무중력 훈련 장비에 탑승해 무중력을 체험하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
대중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그는 기계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말을 하지 못했다. 강연은 거의 녹음에 의존했다. 이필진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는 “1990년대에 캘리포니아공대(칼텍)를 방문한 호킹 박사에게 연구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잘 듣기는 했지만 대답은 한참 뒤에 ‘네(Yes)’라고 말하는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송 책임연구원도 “학회에서 강연하면 질문을 받았지만 그가 편히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질문이 암묵적인 금기였다”고 말했다. 물론 어디에나 눈치 없이 질문하는 학생은 있었는데 대답은 어김없이 “네” 또는 “아니요”였다고 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2007년 보잉 727 항공기를 개조한 무중력 훈련 장비에 탑승해 무중력을 체험하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
젊은 학생들과도 소탈하게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송 책임연구원은 “호킹 박사가 학회 마지막 날 저녁을 젊은 학자들과 보내고 싶다고 해 4명이 조촐히 저녁식사를 했는데, 밥을 얻어먹은 게 미안했는지 아이스크림을 사고 맥주까지 샀다”고 전했다. 이 자리는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나중에는 50여 명이나 돼 떠들썩한 파티처럼 커졌다. 호킹 박사는 3차까지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대중과 소통하길 즐기는 과학커뮤니케이터답게 영화와도 인연이 깊었다. 스타트렉이나 심슨가족 같은 유명 영화에 깜짝 출연하는가 하면 인터스텔라 제작진의 차기작에 자문 등으로 참여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책 집필, 강연 등도 활발했다. 수입도 상당해서 캐나다 온라인 매체 더리치스트에 따르면 호킹 박사가 소유한 순자산은 약 2000만 달러(약 214억 원)로 추산된다.
호킹 박사는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1965년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79년부터 2009년까지 케임브리지대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를 지냈다. 물리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기초물리학상’을 비롯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어워드’ ‘코플리 메달’ 등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노벨 물리학상은 받지 못했다.
호킹 박사는 한국과 인연이 깊지는 않은 편이다. 1990년 가을과 2000년 여름 두 차례 찾아 대중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강연을 한 게 전부다. 그가 지도한 학생 중에 한국인 제자는 없었다.
윤신영 ashilla@donga.com·송경은 동아사이언스 기자·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