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8일에는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12명이 같은 과 A 교수가 그동안 간호사와 의대생, 병원 직원 등을 성희롱했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해 파문이 일었다. 의료계 미투가 다시 주목받은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 상황을 찬찬히 따져 보면 참으로 의아한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미투는 피해자가 직접 소셜미디어나 언론 인터뷰 등 여러 채널을 통해 가해자의 성폭력이나 성추행, 성희롱 등을 폭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의 미투는 피해자와 관련 없는 제3자가 문제를 제기했다. ‘미투’가 아닌 ‘허투(#HerToo·그녀도 당했다)’인 셈이다.
서울대병원 미투의 피해자인 간호사와 병원 직원, 의대생 성희롱 사건은 각각 2013년과 2014년, 2017년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이미 의대 윤리위원회나 대학 인권센터 등에서 조사를 마쳤다. 공교롭게도 모두 피해자가 더 이상의 조사를 원치 않거나 혐의 입증이 어려워 가해자인 A 교수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은 채 종결 처리됐다. A 교수는 “만약 성희롱이 사실이었다면 벌써 사표를 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서울대병원은 서울대 의대와 함께 이번 폭로와 관련해 병원 측 3명, 의과대 측 4명 등 모두 7명으로 공동조사위원회를 급하게 꾸렸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위원회는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가 원치 않는 미투였다는 점이다. 서울대병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에 언급된 한 피해자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에 동의한 교수 12명을 모두 고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피해자들은 자신이 드러나길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제3자인 교수들이 이를 일방적으로 폭로했다. 그것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보듬고 치료해야 할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들이…. 이쯤 되면 미투도, ‘허투’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피해자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교수 12명은 왜 그랬을까.
여러 정황과 증언을 종합하면 동료 교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운 A 교수의 재임용을 막기 위해 나머지 교수들이 ‘미투 형식’을 빌렸을 가능성이 있다. 몇 년 전 과 내에서 법인교수(정규직 교수)를 뽑을 때 순서만 놓고 보면 A 교수가 유력했다. 하지만 당시 학과장인 B 교수는 다른 교수를 추천했다. 결국 A 교수는 법인교수에서 탈락했고, 이때부터 A 교수와 일부 교수들 사이에 이전투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내부 갈등 속에 미투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피해자 보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A 교수의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는지 조사하는 것과 무관하게 나머지 교수들이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게 옳다. 또 A 교수의 부적절한 처신이 담긴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한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나마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C 교수는 필자에게 유감을 나타냈다. 그는 “애초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미투와 큰 관련이 없었다. 과 내에서 A 교수의 재임용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아 보고서에 담은 것이다. 이를 1월에 의대 학장에게 제출했는데, 최근 미투에 초점이 맞춰져 공개됐다. 이번 논란으로 순수한 미투 운동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많은 미투 피해자가 악의적인 신상 털기와 허위 정보 유포 등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김지은 씨가 변호인단을 통해 공개한 자필 편지에는 피해자들의 심적 고통이 절절히 녹아 있다.
김 씨는 “큰 권력 앞에서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폭로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돼 있다. 예상했지만 너무 힘들다”고 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