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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표낭도(剽囊盜)

입력 | 2018-03-15 03:00:00


조선 후기 풍속도 ‘태평성시도’.

“소매치기도 그 사이에 끼어 있어 남의 자루나 전대 속에 무엇이 든 것 같으면 예리한 칼로 째어 빼간다. 소매치기를 당한 줄 알고 쫓아가면 식혜 파는 골목으로 요리조리 달아난다. … 거의 따라가 잡을라치면 대광주리를 짊어진 놈이 불쑥 ‘광주리 사려’ 하고 튀어나와 길을 막아버려 더 쫓지 못하고 만다.” ―이옥(1760∼1815)의 ‘이홍전(李泓傳)’에서


조선시대에도 소매치기가 활개를 쳤다. 이들은 ‘재빨리 주머니 속의 물건을 훔친다’고 해서 ‘표낭도(剽囊盜)’ 혹은 ‘표낭자(剽囊者)’라 불렸다. ‘이홍전’에 나오는 표낭자는 2인 1조. 한 명이 물건을 칼로 째어 훔쳐 달아나면 다른 한 명은 광주리장수로 위장해 쫓아오는 사람을 막았다.

이옥의 ‘시간기(市奸記)’에서는 고가의 일본 단도(短刀)를 두고 김경화와 박 씨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때 소매치기 3명이 등장한다.

부산의 칼 수집가 김경화는 순금 30냥을 주고 산 일본 단도 한 자루를 몸에 차고 서울로 놀러 왔다. 박 씨가 1만2000전을 주며 그 칼을 팔라고 했지만 김경화는 거절했다. 박 씨는 “어차피 소매치기를 당할 것이니 내게 파는 것이 이익이다”라고 했다. 김경화는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후 김경화와 박 씨 사이에 칼을 둘러싼 게임이 사흘 동안 벌어졌다. 박 씨는 표낭도 3명을 섭외했고, 김경화와 함께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박 씨는 칼을 표낭도들에게 보여주며 사흘 안에 훔쳐 오면 보수를 넉넉히 주겠다고 했다.

김경화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칼을 확인하며 이틀 동안 칼을 지켰다. 마지막 날 김경화는 소광통교(小廣通橋·청계천 광교 주변 다리)를 지나다가 한 사람과 마주쳤다. 순박해 보이지만 화려한 옷을 입은 이 사람은 김경화에게 ‘왼쪽 어깨에 이가 기어간다’고 조롱했다. 김경화는 얼굴을 붉히며 오른손으로 이를 털어냈다. 그리고 몇 걸음 걷고 보니 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칼은 박 씨의 손에 있었다.

1921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도 ‘스리도적’(소매치기) 통계가 나온다. 1920년 총 333건의 소매치기 사건이 보고됐는데, 전차에서 일어난 사건이 233건으로 가장 많았고 정거장과 영화관, 길거리 등이 뒤를 이었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