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진실 밝히는 과학의 힘’ 국과수 사람들
올 1월 강원 원주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에서 최지훈 교통사고분석과 연구관이 ‘지바겐’으로 불리는 배우 김주혁 씨의 벤츠 G63AMG 차량의 결함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최 연구관은 지난해 10월 30일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 씨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약 3개월간 그의 차량을 감정했다. 원주=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교통사고분석과 최지훈 연구관(46)이 외쳤다. 그의 앞에는 ‘지바겐’으로 불리는 벤츠 G63AMG 한 대가 서 있었다. 차량을 둘러싼 채 서 있는 동료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펑.’
지난해 10월 김 씨는 검은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운전하던 중 일어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차량은 심하게 파손됐다. 윤곽을 알아볼 수 없었다. 엔진마저 부서져 시동조차 걸 수 없었다. 최 연구관은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와 한 달 만에야 겨우 엔진을 손봤다. 그런데 엔진오일 탱크가 파손된 걸 놓쳤다. 다시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지바겐의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진짜 감정은 이때부터다. 사고 차량에는 사고기록장치(EDR)가 없다. 모든 부품을 감정하고 가능한 모든 가설을 계산하고 해석해야 했다. 최 연구관은 사고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렸다. 이는 3차원(3D) 영상으로 재구성됐다. 그는 이를 통해 차량의 움직임과 당시 속도를 추정했다.
다음 단계는 ‘피어리뷰(Peer Review·동료 평가)’. 감정 결과에서 오류를 찾아내고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토론과 수정이 무한 반복된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수차례에 걸친 피어리뷰를 거치며 감정서를 고치고 또 고쳤다.
‘차량 결함 및 기계적 오작동 흔적이 없다.’
○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기지 않는다
지난달 강원 원주시 국과수 본원에서 최 연구관을 만났다. 3개월에 걸친 진실 추적 과정에 대한 심경을 물었다.
“최종 감정 결과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끊임없이 오류를 배제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내가 불편한 거 잘 알죠. 그런데 내가 너무 불안해요. 반대편에서 돌덩이가 날아와 사고가 나는 것처럼 전혀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게 교통사고예요.”
○ 담배꽁초와 머리카락만 찾아 헤맨다
2010년 입사한 법유전자과 정주연 연구사(35·여)는 지난해 미제 사건이던 ‘대구 노래방 여주인 살인 사건’ 해결의 일등공신이다. 영구 미제가 될 뻔한 범행을 밝힌 결정적 단서는 담배꽁초였다.
지난해 11월 대구 중구에서 A 씨가 20대 여성을 둔기로 때리고 손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는 현장에 담배꽁초를 남겼다. 여기에 남은 DNA가 2004년 대구 북구의 한 노래방에서 발생한 40대 여주인 흉기 살인사건 용의자와 일치했다. 당시에도 담배꽁초가 현장에 있었다. 정 연구사는 DNA 데이터베이스를 업그레이드해 식별력을 높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일치 여부를 확인했다.
정 연구사는 집에서 가끔 식탁 위에 놓인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 남편이 “텅 빈 곳을 왜 뚫어져라 쳐다보냐”고 묻는다. 정 연구사는 “모발에서 DNA를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어디서든 머리카락이 눈에 콕콕 들어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정 연구사가 접하는 감정서는 1주일에 60∼70건. 그는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하게 돼 동네 모임에도 나가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 연구사가 계속 일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제가 맡은 사건이 어느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부’일 수 있잖아요.”
○ ‘연예인 마약’ 뉴스 나오면 외박한다
“아무리 봐도 양귀비 씨 같은데….”
마약 분석을 담당하는 법독성학과 이재신 연구관(48)이 독일로 출장을 갔을 때다. 호텔 조식으로 제공된 빵 위에 작은 씨앗들이 올려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소형 확대경인 ‘루페’를 꺼냈다. 식사를 중단하고 루페로 빵 표면을 한동안 들여다봤다. 양귀비 씨였다. 이 연구관은 “씨 자체에는 환각 성분이 거의 없다. 해외에서는 양귀비 씨 빵을 팔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연구관은 빵을 먹지 않았다.
그는 해외 출장 때 늘 루페를 챙긴다. 마약 종류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관련 범죄도 늘고 있다. 유사 마약까지 포함하면 종류가 2000종에 이른다. 그는 “새로 나오는 신종 마약까지 분석하고 공부하려면 항상 마약에 대한 관심을 놓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연구관은 1997년 국과수에 입사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뉴스 모니터로 시작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저녁 뉴스를 챙겨 본다. 포털사이트 실검(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연예인 ○○○ 마약’이 오른 날은 24시간 비상 대기다. 십중팔구 이 연구관에게 소변과 모발 감정 의뢰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연예인 중에 가명을 사용하는 분들이 많아 누군지 모르고 감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TV를 보고 내가 감정한 사람이 유명 연예인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 아이 앞에서 가장 힘들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 10년차 박소형 법의관(41·여)은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아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자살하는 부모에 의해 함께 숨진 아이, 미혼모에게 버려졌다가 사망한 신생아들이다. 이런 아기를 부검하기 위해 메스를 잡을 때면 견디기 힘든 무언가가 박 법의관의 심장을 콕콕 찌른다.
“계속 살았다면 학교도 가고 결혼도 했을 텐데, 그렇게 자신의 꿈을 위해 잘 달려갔을 텐데….”
아이의 시신을 부검하다 보면 박 연구관은 종종 이들이 가졌을 꿈이 무엇일까 떠오른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큰 장벽을 실감한다.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래도 나름 전문가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느끼죠. ‘인간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라는 걸 실감합니다.”
소아 부검은 성인보다 까다롭다. 단순히 몸이 작아서가 아니다. 학술적인 연구 정보도 적다. 그래서 어른보다 시간이 더 걸릴 때가 많다. 부검 시간이 길어지면 박 법의관도 애가 탄다.
“모든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더 같이 보내길 원하는 유족들을 대할 땐 저도 버티기가 쉽지 않습니다.”
10년째 부검을 하다 보면 유형에 따라 비슷한 방식이 반복된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박 법의관은 스스로에게 “한 건 한 건 모두 다르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자”고 다짐한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일 시신을 보는 건 힘들다. 그래서 5∼7년차에 그만두는 법의관이 많다. 박 법의관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일하다 보니 어느새 10년차 법의관이 됐다”고 말했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1987’에는 국과수 법의관도 등장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부검을 맡았던 당시 국과수 황적준 법의학1과장(71)이다. 그는 부검을 통해 박 씨의 사인을 밝혔다. 박 법의관은 이런 선배들의 고민과 고통을 잘 기억한다고 밝혔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진실을 찾기 위한 고민 하나만으로도 후배들에게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후배로서 감히 선배들과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발걸음으로 지금의 국과수가 존재하는 만큼 앞으로 선배들이 닦은 길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18 국과수 ‘신입 선생들’ ▼
석-박사급 전문인력 대거 응시… 평균 경쟁률 20대 1 훌쩍 “삼수는 기본”
법의관만 여전히 지원자 부족… 열악한 근무 여건-급여 개선 필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유전자과 조윤정 연구사(32·여)의 목소리에선 자부심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조 연구사는 지난해 12월 국과수에 ‘입사’한 신입이다. 그는 삼수생이다. 면접까지 올라갔다가 두 번이나 떨어진 뒤 도전 세 번째 만에 합격했다. 조 연구사는 “아직 감정서를 직접 쓰지는 않지만 언젠가 내가 작성한 감정서가 수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진중하게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국과수에 채용된 직원은 조 연구사를 포함해 19명.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국과수 입성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국과수 신입직원은 일반 기업의 신입보다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높다.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둔 신입직원도 많다. 대부분 의사나 약사 면허를 취득하거나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입사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자리를 박차고 신입직원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다. 법안전과 이제현 연구사(39)도 늦깎이 신입이다. 물리학 박사인 이 연구사는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운 과학을 실제 현장에 적용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국과수 직원들은 호칭도 예의를 갖춘다. 신입직원을 ‘선생’으로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교통사고분석과 박정우 연구사(33)는 아직 ‘박 선생’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다. 그는 외국계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하다 국과수에 지원해 합격했다. 박 연구사는 처음 국과수가 교통사고까지 분석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국과수에서 하는 일을 자세히 알게 된 뒤 꿈을 키웠다. 그는 “기존 회사보다 급여는 낮다. 하지만 20년 후 나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지원했다”고 밝혔다.
국과수 입사 경쟁률은 생각보다 높다. ‘삼수는 기본’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2016년 경력직 채용시험 때는 의료기술 서기보 한 명을 뽑는 데 99명이 지원했다. 다른 직군의 경쟁률도 대부분 20 대 1을 넘는다.
단, 예외가 있다.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이다. 2016, 2017년 국과수는 법의관 채용공고를 4차례 냈다. 하지만 항상 지원자가 모집인원보다 적었다. 아예 한 명도 없던 적도 있었다. 지난해 11, 12월 지역분원 법의관 채용 때 지원자는 ‘0’이었다. 현재 국과수 내 법의관 정원은 46명. 근무 중인 법의관은 31명이다.
법의관 지원이 적은 건 급여와 열악한 근무여건 탓이 크다. 법의관은 의사면허가 있어야 지원 가능하다. 국과수 법의관은 평균적으로 일반 의사 수입의 70% 정도의 급여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의관 1명이 담당하는 부검업무는 연간 250여 건이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지난해에만 법의관 5명이 국과수에서 퇴직했다.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나가는 사람만 있으니 남은 사람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과중한 업무와 심각한 인력난 등이 중증외상센터와 판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영식 국과수 원장은 “법의관 연봉을 국립대병원 수준으로 올리는 한편 법정에서 부검과 관련된 증언을 할 경우 전문가 직급에 맞게 출석수당 지급 같은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주=구특교 kootg@donga.com·신규진 기자·정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