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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재 5→3단계 ‘다이어트’… LTE조직 돼 야근 줄었다

입력 | 2018-03-20 03:00:00

[2020 행복원정대:워라밸을 찾아서]2부 일하는 방식이 확 달라진다
<5> ‘조직 단순화’로 업무 속도전





“업무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한 상사가 최악이다.”

모 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불명확한 업무 지시, 이로 인한 첨부만 수십 장인 보고서, ‘대책’ 없는 대책회의를 야근으로 이어지는 3대 비효율로 꼽았다.

당장 올해 7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안착시켜야 하는 300인 이상 기업의 고민 중 하나는 이런 비효율 없애기다. 업무시간은 줄여야 하는데 생산성은 최소한 유지하거나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직원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다 최근 한국에 돌아온 이진형(가명·35) 씨. 그에게 가장 적응하기 힘든 점 중 하나는 모호한 팀장 지시 해석하기였다. 이 씨는 “못 알아들어도 다들 되묻지 않는 점도 신기했고, 팀장도 다 알고 지시하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최근 기업들은 ‘조직 다이어트’ 중이다. 의사결정 단계를 줄이면 불명확한 업무 지시와 보고 단계를 대폭 축소할 수 있다. 부서 간 협업에 걸리는 시간과 시장 대응도 빨라진다. 한 5대 그룹 임원은 “예전에는 위에서 ‘돌격’ 하면 모두가 야근하며 1등 따라잡기에 나섰다. 그건 롤 모델이 있던 시절에나 쓰이던 방식이다. 이젠 1등의 길이 틀릴 수도 있고, 누가 1등인지도 모르게 시장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 빠른 조직, IT기업의 비결은

말하면 음악도 틀어주고, 메시지도 보내주며 택시도 잡아주는 똑똑한 스피커. 카카오가 지난해 9월 시장에 선보인 인공지능(AI) 스피커 ‘카카오 미니’다. 출시 5개월 만에 판매량 10만 대를 넘었다.

소프트웨어(SW) 정보기술(IT) 기업인 카카오에 하드웨어(HW) 제조는 처음이었다. 시장의 우려도 있었지만 카카오는 개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카카오 미니’를 출시했다. 경쟁사 대비 시간을 4배 이상 단축한 것이다.

비결은 팀 신설과 폐지를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애자일(Agile·기민한) 조직’이었다. 카카오는 카카오 미니 개발 방향이 정해지자마자 AI 부문 산하에 음성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 ‘A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AI 부문 팀원들이 주축이 됐고 카카오톡, 콘텐츠, 포털 등 전 부문 팀원들이 A TF에 모였다. 한 팀에 HW, SW 개발, 마케팅까지 회사 전 분야의 팀원이 각각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였다.

A TF 팀원은 100명에 달했다.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였다. 몸집은 컸지만 협업이 필요하면 지체 없이 관련 팀원끼리 논의가 이뤄졌다. 이 부서 저 부서 업무 협조를 구하기 위한 결재 서류와 보고서는 필요 없었다. 팀원들은 빨리 제품을 출시하려 매일 야근을 달고 살았을까? 카카오 관계자는 “그렇지 않았다”고 답했다. “TF를 만들 때부터 가능한 시기와 그에 맞는 인원을 정한다. 출시 후에도 업데이트가 가능해 굳이 야근을 하지 않는다.”

황성현 카카오 인사총괄 부사장은 “수평적인 소통과 협업이 가능한 기업문화, 이에 더해 빠른 의사결정 구조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라고 했다. 카카오에서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조직 개편이 이뤄지기도 한다. 관료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셈이다.

○ 혁신은 야근 아닌 ‘애자일 조직’에서

관료주의 성향이 짙었던 전통적 스타일의 기업들도 IT기업 식 애자일 조직으로 변신 중이다.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지난해 사내 연구개발 성과 공유 행사에서 “우선 실행하고, 빨리 실패해 보고, 실패를 통해 다시 배우고, 다시 시도해보자”는 내용의 애자일 혁신을 당부하기도 했다.

애자일 조직 실험이 가장 활발한 곳은 금융권, 그중에서도 카드업계다. 대표적으로 현대카드는 2014년부터 빠른 ‘심플리피케이션(simplification·단순화)’ 캠페인을 통해 팀장 결재가 필요했던 10여 종의 업무를 ‘서비스데스크’ 일괄 결재로 통합했다. 이에 더해 빠른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기 위해 약 5개월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월부터 애자일 조직 체제로 개편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조직체계의 단순화다. 기존의 ‘본부-부본부-실-팀-센터’ 다섯 단계조직체계를 ‘본부-실-팀’ 세 단계로 일원화했다. 이 과정에서 50여 개에 달하는 부본부와 센터가 폐지됐다. 부본부는 본부로 통합됐고 센터들이 폐지되면서 센터가 하던 역할을 팀이 함께 수행하게 됐다. 기존에는 팀이 전략을 짜고 센터가 전략을 수행했다면 팀이 전략 수립과 수행을 같이 하는 체제다.

현대카드 인사팀 관계자는 “기존에는 실무를 가장 잘 아는 하위 조직에서 결정한 사안들이 상위 조직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왜곡되는 문제도 발생했다”며 “조직 개편으로 결재 단계가 대폭 축소돼 의사결정이 빠르고 정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ING은행 ‘9명 분대조직’ 실험… 두달 걸리던 업무 2주로 단축▼


“지금 여러분을 전원 해고합니다.”

2015년 어느 금요일, 네덜란드 ING은행은 암스테르담 아레나 스타디움에 전 직원을 모아놓고 이같이 발표했다. 이어 다음 주 월요일, 전원 새 직책으로 재발령냈다. ING은행이 개발한 ‘애자일(Agile·기민한)’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이 모델은 현재 글로벌 기업들이 벤치마킹하는 조직 혁신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됐다.

ING은행의 애자일 모델은 가벼운 조직과 빠른 업무 처리가 특징이다. 9명 이내로 ‘분대’를 꾸리고, 지속적이고 자발적으로 혁신하게 만들었다. 마케팅, 상품, 정보기술(IT) 등 다양한 부서의 직원이 한 분대를 구성한다. 직원들이 업무 처리를 빠르게 하기 위해 문서나 보고 체계를 최소화하고 자율성을 강화한 대신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두세 달 걸리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기간이 2주로 단축됐다. ‘내재적 동기부여’도 빼놓을 수 없다. 말단 직원에게도 권한과 책임을 줬더니 성과가 늘었다. 혁신적인 신제품이 나왔고 ING은행은 네덜란드 대표 모바일 은행이 됐다. 조직 혁신을 위해 ING은행은 구글과 음악·동영상 업체인 스포티파이 등 다른 업종의 기업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ING의 사례는 ‘결재 대기와 흐지부지 의사결정, 느린 시장 대응’이 고민인 기업들에 적용할 만하다는 게 경영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강혜진 맥킨지 파트너는 “유럽의 한 화학회사는 특정 연구개발(R&D) 조직만 애자일 개념을 도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특정 미션이나 조직에만 도입하거나 ING처럼 경영진이 아예 조직 전체를 바꿀 수도 있다”고 했다.




■ 경영잡학사전 : 신속-날렵한 ‘애자일 조직’

부서간 협업시간 줄여 ‘원스톱 혁신’ 유도


1번부터 5번까지 5명이 줄 서 있다고 치자. 1번부터 5번까지 차례로 업무 지시를 하다 보면 중간에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1번의 의도와 5번이 이해한 것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5번은 오늘도 열심히 쓴 보고서를 퇴짜 맞고 또다시 야근하게 된다. 부서 간 협업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점도 대표적인 비효율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도 대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애자일(Agile·기민한)’ 조직이다. △기민함(agility) △부서 간 핸드오버(handover·업무 떠넘기기) 축소 △플레잉 코치 리더 △자원과 인력의 신속한 재배분이 키워드다. 정보기술(IT) 업계의 빠른 조직을 전통적인 산업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애자일 조직의 핵심은 부서 간 업무에서 일어나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한 부서 내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개념이다. 그러면 많은 부서장이 필요 없기 때문에 리더의 역할은 관리자가 아니라 플레잉 코치가 된다. 팀이 매번 바뀌기 때문에 자원과 인력을 빠르게 배분할 수 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김성모 기자 mo@donga.com·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