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인 남북관계 변화 없어… 새로운 의제보다 과거 내용 살펴야 남북기본합의서 이행했다면 평화공존의 단계에 이미 진입했을 듯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안보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에 새로운 의제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남북 관계에서의 변화가 없기에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기보다는 과거 남북한이 합의한 것들을 살펴보고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만하다. 문재인 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남북 관계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제반 분야를 포괄하는 합의를 담고 있는 것은 1991년 12월에 남과 북이 합의하고 이듬해 2월에 발효시킨 남북기본합의서(공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다. 기본합의서에는 화해, 불가침, 그리고 교류와 협력에 관한 사항들이 담겨 있다. 또한 1992년 9월에 채택된 부속합의서들도 각 분야에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인 조치와 이행 방안들을 담고 있다. 또한 1991년 12월 31일 채택한 비핵화공동선언에는 남과 북이 당사자가 되어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활용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고 본다. 먼저,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합의된 사항을 확인하고 살려 나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한 면이 있다.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는 화해와 불가침, 교류와 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협의와 합의의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이행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종전선언(終戰宣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보수층은 종전선언은 자칫하면 현 안보 상황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오고 현재 유지되고 있는 정전협정 체제를 급격히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기본합의서에는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될 때까지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 북한이 기본합의서의 복원과 이행에 합의한다면 우리는 평화 체제로의 전환 절차를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 장치를 확보하게 되어 안정적 전환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화해와 협력의 단계를 넘어 평화 공존의 단계에 이미 진입했을 것이다. 제1차 북핵위기가 시작되면서 북한은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합의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취해 왔다. 만일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 두 개의 합의를 복원하고 이행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고 불완전한 합의를 이루기보다는 과거의 것을 살리는 방향에서 접근하면서 북한의 의도를 확인하고는 이행을 보장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문제는 이행에 있다.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기에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은 사문화되었다.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이행을 안 했을 시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유지되고 있는 제재와 국제공조이다. 북한의 호응과 이행의 정도에 따라 제재와 압박을 풀고, 반대로 이행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 이상의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점을 북한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대화 시작만으로는 제재 이완도, 선물도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