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원스토어 이북사업팀 매니저
관광객으로서 갠지스강에 머물며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썩 많지 않다. 기껏해야 낡은 나무 보트를 타고 꽃초인 ‘디아’를 띄우면서 소원을 빌거나, 힌두교 의식인 ‘푸자’를 보거나, 화장터를 구경(?)하는 것 정도. 여행자로서의 미션을 완수한 이튿날부터는 아침저녁으로 보트를 타고 일출 일몰을 보는 것이 유일한 일이라면 일이었다.
운 좋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보트맨 ‘철수’를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도인들은 시바신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성스러운 강물로 영혼이 속죄 받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그 덕에 한쪽에서는 시체를 태워 강물에 뿌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빨래를 하고 몸을 씻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소, 개, 원숭이 같은 동물과 성직자, 임산부 등은 대개 신과 가까이 있는 존재라 하여 화장조차 하지 않고 수장한다고 하니, 이쯤 되면 오늘 밤 여기서 빤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였다.
생의 일부로서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계획하며 가까이에 두고 사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사고가 나를 지배하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져 생에 충실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계획하는 것을 한심하거나 철이 없거나 괴짜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는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외면하고 산다.
그런데 문득 원하는 죽음이 있고 이를 계획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어졌다. 나는 죽는다. 내 남편도, 부모님, 시부모님, 사랑하는 형제, 친구들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다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엔딩을 위한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엔딩은 이러한 물음에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보다 덜 당혹스럽고 만족스러운 방향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 하러 기를 쓰고 사냐는 비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는 낙관, 어느 방향이든 상관없다. 단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생의 계획 안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 생의 순간순간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김지영 원스토어 이북사업팀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