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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학술책 1600권 출간… ‘학문 고속도로’ 닦는게 소명”

입력 | 2018-03-22 03:00:00

소명출판사 박성모 대표의 뚝심




박성모 소명출판사 대표는 “출간된 책을 모두 검토하느라 시력은 형편없이 떨어졌고 여전히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 꾸려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초연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할 때 그는 활기가 넘쳤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900쪽이 넘는 예사롭지 않은 책 한 권이 최근 출간됐다. 제목은 ‘소명출판 20년, 한국문학 연구 20년’. 학술적 가치는 높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전문연구서적 출판에 매진해 온 이 출판사가 설립 2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여정을 모았다.

서울 서초구의 오래된 건물 한 층에 위치한 소명출판사를 13일 찾아 박성모 대표(55)를 만났다. 박 대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더 두꺼워진 새 책부터 내밀었다. 20주년 기념 책에 오류가 있어 회수하고 1000부를 다시 찍었다는 거였다. 아연실색하자 그는 “어차피 팔릴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비용보다 정확한 게 중요하다”며 웃어 보였다.

박 대표의 고집스러움은 출판사 행로 곳곳에 녹아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강의도 해봤지만 맞지 않았다. 그보다는 출판이 재미있었다. “주석 하나에 몇날 며칠 매달리는 연구자가 귀했고, 그렇게 어렵게 쓴 글의 오류를 매의 눈으로 잡으며 책 만드는 게 재밌었다”고 한다.

그에게 “기초연구는 고속도로”였다. 길이 있어야 누군가는 달리기 때문이다. 열정 있는 연구자들과 합심해 그 ‘길 닦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그 덕에 외환위기 당시 차린 1인 출판사가 연간 80여 종씩 총 1600권을 펴낸 근·현대문학 연구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국문학자들에게 소명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건 영예로 여겨지기도 한다.

박 대표는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 대표적 사례로, 이념·상업적 이유로 외면되던 시인 임화(1908∼1953) 연구를 9년에 걸쳐 집대성해 전집을 펴냈다. 사재를 털어 임화문학예술상도 만들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책으로 그는 주저 없이 ‘임화전집’을 꼽았다.

물론 자리를 웬만큼 잡은 지금도 학술 출판은 험난한 여정이다.

“국내 출판사가 5만 개가 넘습니다. 일본의 3배예요. 정제돼야 할 출판업계에 한탕주의가 만연해 있고, 정부는 나눠주기식 지원으로 오히려 이를 부추기고 있으니 안타깝죠.”

박 대표가 특히 속상한 건 기초연구자는 홀대받는데 관련 논문 하나 쓴 적 없는 일반교양서 저자들이 전문가로 더 각광받는 현실이다. “기초학문이 바로 서지 않고는 현실을 보는 정확한 관점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던보이’ ‘신여성’을 앞세워 일제강점기를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그려낸 영화나 서적들을 예로 들었다. “역사에 대한 위험천만한 인식을 퍼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출판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동아시아 근현대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조망’에 큰 관심을 둬왔다. 스무 살 때부터 각지 헌책방을 돌며 수집한 일제강점기 자료만 한 트럭이 넘는다. 이런 자료를 분석해 당대를 조망해보는 새로운 저작들도 준비하고 있다.

“히트작을 잡으려는 출혈 경쟁 같은 건 여전히 관심 없습니다. 호흡 맞는 연구자들과 자료를 분석해 독자적으로 세상에 내놓는 게 출판인으로서 일말의 자존심이니까요.”

20주년을 맞아 소명출판사도 여러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학자들과 직원들이 함께 출판사를 경영하는 공동운영 방식도 구상 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함없다. “100년 이상 가는 기초학문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것.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박 대표의 목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