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글로벌 생활용품기업 ‘도브’의 2011년 광고. 피부미용 제품 사용 ‘전’에는 흑인 모델을, ‘후’에는 백인 모델을 세웠다. 사진 출처 도브
조은아 국제부 기자
21일(현지 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이민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도심을 행진했다. 느디아예 씨는 세네갈에서 온 35세 청년. 미등록(불법 체류) 신분으로 마드리드에서 노점상으로 일하던 그는 15일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목격자들은 그가 경찰을 피해 급히 달아나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경찰의 무리한 단속이 빚은 참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분노한 이민자들은 다음 날 저녁 도심의 오토바이와 쓰레기통에 불을 질렀다.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된 시위로 버스 정류장과 은행 건물이 파손됐고 경찰을 포함한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이 폭력을 멈추고 21일 행진에 나선 이유는 이날이 유엔이 정한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어서다.
이민자가 많은 유럽에선 21일을 기해 인종차별의 피해를 고발하고 심각성을 진단하는 논의가 활발했다. 영국 언론은 영국 남서부 데번의 엑서터대가 “학생들의 인종차별 행위를 엄중하게 조사하겠다”고 밝힌 뉴스를 연이어 다뤘다. 이 대학 학생들이 최근 모바일 메신저에서 비공개로 인종혐오 발언을 쏟아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우린 인종 전쟁을 해야 한다” “영어를 못하면 집으로 가라”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대학가는 발칵 뒤집혔다. 여론이 술렁이자 일간지 가디언은 이날 ‘대학 내 인종차별 피해를 제보받는다’는 공지를 홈페이지에 걸었다.
국내 한 대학에서 국제정치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케냐인 여학생 줄리아(가명) 씨는 지하철에서 종종 50, 60대 남성들에게서 “돈 벌러 왔냐.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란 말을 들어야 한다. 좌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 승객들도 있다. 그는 이제 지하철에선 빈자리가 있어도 서 있는 게 더 편해졌다.
길거리나 지하철이 아닌 제도권 대학에서마저 인종차별 발언이 제어되지 않는다. 경북의 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인도 유학생 라자르(가명) 씨는 얼마 전 대학 행정실에 박사과정 장학금을 신청하러 갔다. 그가 장학금 신청 절차에 대해 묻자 담당 직원은 “거지같이 왜 돈을 받으러 왔느냐”고 쏘아댔다. 혐오 발언을 금하는 대학 내규도 없고 억울함을 호소할 창구도 없으니 그는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에선 이주민에 대한 혐오 발언이 고삐 없이 풀린다. 중국에서 조선족 여성작가로 활동하다 8년 전 한국에 온 박연희 씨(57)는 몇 년 전 국내 포털에 ‘조선족 이야기’를 연재했다가 큰 상처를 받았다. 댓글 10개 중 9개는 욕설이었다. 대부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같은 원색적 폭언이었다. 박 씨는 이런 혐오가 편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범죄 통계를 보면 조선족 범죄율이 다른 외국인이나 한국인에 비해 높은 것도 아닌데 ‘조선족은 범죄자’란 선입견이 강하다는 얘기다.
혐오 발언이 특히 두드러지는 온라인 댓글은 국민 여론 전체를 대변하는 지표로 오용되기도 한다. 일부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편향된 댓글을 달고 최근에는 ‘가짜 아이디(ID)’를 대량 사들여 여론을 조작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주민 중 취약계층을 보호하자는 언론이나 인권단체의 요구에 관련 부처들은 댓글을 근거로 “아직 반이민 정서가 강하다”며 난색을 표한다.
최근 청와대가 발표한 개헌안은 기본권의 보장 범위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넓혔다. 한국 국민이 아니어도 외국인이든 무국적자든 그 신분을 묻지 않고 인간 존엄성, 행복추구권, 평등권, 생명권,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등은 꼭 보장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다른 법과 제도도 변화된 시대에 맞게 정립해 나갈 것이라고 믿고 싶다.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