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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툴지만 당돌한 날것의 반란… 내추럴와인이 뜬다

입력 | 2018-03-24 03:00:00

[토요기획]조용한 돌풍 내추럴와인의 세계




포도 재배와 양조 과정에서 화학첨가물을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를 지향하는 내추럴와인 생산자들은 “내추럴와인은 단순한 와인이 아니라 정치와 철학을 아우르는 문화현상”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미끈하고 럭셔리한 와인을 기대하지 마라. 이것은 진짜 땅에서 키운 진짜 포도로 만든 날것의 와인이다.’(2017 뉴욕 내추럴와인페어)

맛과 멋의 대명사 와인계에 별종이 나타났다. 유기농으로 키운 포도로 화학첨가물을 배제해 만든 내추럴와인이다. 독립영화처럼 기존 평가 잣대를 부정하는 내추럴와인에 기성 와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전 세계 힙스터들 사이에서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내추럴와인의 세계를 소개한다.



#1 서툴지만 당돌한 매력

와인1. 시큼하고 달달한 파인애플향이 난다. 와인2. 커피향이 감돈다. 와인3. 알갱이 같은 게 씹힌다. 와인4. 기존에 마시던 와인과 비슷하다.

16일 오후 1시 서울 서초구 봉은사로의 한 빌딩 지하에서 ‘낮술파티’가 열렸다. 주종은 내추럴와인, 행사명은 ‘제2회 살롱오(Salon O)―내추럴와인의 모든 것’. 와인 수입사, 외국인 생산자 19명, 와인 애호가가 함께한 내추럴와인 부흥의 장이었다.


이날 맛본 30여 종의 내추럴와인은 처음엔 아리송하다가 나중엔 설렜다. 향과 맛이 그동안 마시던 와인과 다른데? ‘이게 뭔가’ 싶다가 이내 다음 와인은 어떻게 말을 걸어올지 궁금해졌다.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의 소감도 비슷했다.

“재미있고 당돌해서 좋아요. 집술처럼 푸근한 느낌도 들고요. 누구는 ‘마구간 와인’이라고 폄훼하지만 ‘뻔한 맛’의 틀을 깬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김준태 씨·31·직장인)

“내추럴와인은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모두 목 넘김이 부드러워요. 12∼13도로 기존 와인(13∼15도)보다 도수가 낮고 화학첨가물이 적어서 그런지 술술 넘어갑니다. 숙취도 확실히 덜하고요.”(김수옥 씨·37·레스토랑 ‘주옥’ 매니저)


#2 “오직 포도뿐”

“포도, 포도, 포도.”

프랑스 아르데슈주에서 와인을 만드는 제랄드 오스트리치 씨(56)는 내추럴와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추럴와인은 1970년 처음 알려졌지만 10년 전부터 유럽의 힙스터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포도 재배와 양조 과정에서 비료 농약 당분 이산화황 등을 최대한 배제한 와인을 뜻한다. 수천 년 전 포도를 자연 발효시켜 만들던 와인의 원형을 지향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과 유통 모두 쉽지 않다. 포도나무에 벌레가 쉽게 끓고 순간 방심하면 식초로 변하기 일쑤라고 한다. 그럼에도 생산자들은 “실패도, 맛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라고 말한다. 오스트리치 씨는 “내추럴와인 한 병을 얻기까지 손이 많이 가고 장애물도 많다. 그럼에도 화학첨가물을 쓰는 건 반대”라며 “인간이 바라는 하나의 맛을 위해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려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3 新와인 문화운동

해질 무렵 뺨에 홍조가 오른 참가자들이 베레모를 눌러 쓴 남성에게 ‘와인병 사인’을 청했다. 기존 와인계에 맞서며 이름을 알린 프랑스 생산자 알렉상드르 뱅 씨였다. 그의 별명은 ‘내추럴와인 전사(戰士)’. 프랑스 배우이자 감독인 기욤 카네와 함께 영화(‘땅의 아들’)도 촬영 중이다. 뱅 씨 외에 필리프 장봉, 장클로드 라팔뤼, 앙리 밀랑, 세바스티앵 리포 등의 생산자가 유명하다.

내추럴와인은 단순한 와인이 아닌 ‘신(新)와인 문화운동’이라 불린다. 기존 와인계 문법을 무너뜨리는 태도 때문이다. 이들은 환경 파괴, 규격화, 대량화를 반대한다. 트랙터 대신 쟁기와 손으로 농사를 짓고, 생산지와 시간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품평을 비판하며, 기업자본의 대량생산을 배척한다.

뱅 씨는 “소믈리에들은 기계를 해체하듯 심각하게 와인을 맛본 뒤 작은 흠집을 찾는다”며 “와인도 사람처럼 장단점이 있는 생물이다. 자연스러운 흠집을 가리려 황을 먹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덴마크 와인 생산자 안데르스 프레데리크 스텐 씨(36)는 “우리가 지향하는 건 건강한 먹거리, 지구, 사회”라며 “다양한 환경(테루아)을 충실히 반영한 와인이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4 “실체 없는 사기”

내추럴와인에 대한 반대 여론도 거세다. 반대론자들이 내세우는 가장 주된 이유는 맛이 이상한 데다 근거 없이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운다는 것. 미국의 와인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이미 훌륭한 와인들은 최소한의 화학첨가물을 사용한다. 또 필터링 과정에서 화학첨가물은 대부분 사라진다”고 했다. 미국의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과거 자신의 트위터에서 “내추럴와인은 실체 없는 사기”라고 혹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추럴와인의 기세는 만만치 않다. 전 세계 소비량은 전체의 2%에 불과하지만 파리 런던 코펜하겐 등에선 내추럴와인 전문 바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도 내추럴와인 붐이 시작됐다. 정식바, 쿠촐로 테라짜, 주옥, 밍글스, 빅나이트, 제로컴플렉스, 라피네 등에서 내추럴와인을 맛볼 수 있다. 가격은 와인숍 3만, 4만 원, 와인바 7만, 8만 원 선.

살롱오 행사를 주관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와인에이전시 비노필 최영선 대표(50)는 “내추럴와인을 마시면서 몸이 건강해졌다. 숙취도 없다”며 “지난 1년간 한국 내추럴와인 소비량이 두 배로 뛰었는데, 향후 시장 점유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5 와인 패러다임 전환

상당수 내추럴와인 생산자는 청년층이다. 보르도나 부르고뉴 같은 기득권 생산지에 구애받지 않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어서다. 이들은 “내추럴와인은 삶에 대한 태도다. 올바르게 생산된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돼라”고 소비자를 유혹한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지난 10여 년간 안착한 내추럴와인 시장은 더 커질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와인을 만드는 필리포 오 씨(38)는 “내추럴와인은 온도와 진동에 특히 민감해 수출과 수입 과정에서 맛이 변하는 일이 잦다. 날씨가 따뜻한 3∼9월엔 수입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라며 “유통 과정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와인 매거진 ‘디캔터’는 “내추럴와인의 가장 절묘한 전략은 부모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되 적당히 팔릴 정도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만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내추럴와인은 단순한 와인이 아니다. 콧대 높은 와인계에 일침을 가하는 패러다임 전환이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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