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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이 한줄]‘가면’을 강요하는 사회

입력 | 2018-03-26 03:00:00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트로츠키 만세!―농담(밀란 쿤데라·민음사·1999년)




#체코 프라하의 대학생 루드비크는 엽서에 이런 문장을 썼다가 인생이 꼬였다. 때는 공산주의 혁명이 동유럽을 휩쓸던 1949년. 사유지가 몰수되고 대학 운영권은 공산당 학생위원회로 넘어갔다.

독재시대가 으레 그렇듯 개인에게는 가혹한 사상통제가 가해졌다. 그중에는 공산당이 편지를 뜯어보는 조치도 있었다. 몰래 체제에 반하는 책을 읽거나 불온한 사상을 품은 자가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스무 살 루드비크는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했다. 당시 허용되던 유일한 이념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반하는 생각을 편지에 내뱉어버린 것이다. 이 일로 그는 학생위원회에 끌려갔다. “농담이었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절친한 친구들마저 그에게 퇴학 선고를 내렸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어요.”

지난주 서울에서는 20대 여성이 이런 말을 했다가 사상범으로 몰렸다.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었다. 팬미팅에서 ‘최근에 읽은 책이 뭐였느냐’는 질문에 베스트셀러 소설인 ‘82년생 김지영’을 꼽았다.

이를 본 일부 남성 팬들은 행사가 끝난 뒤 ‘아이린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을 불태우는 장면까지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논란은 커졌다. 성차별 문제를 다룬 소설을 읽은 아이린에게 ‘페미니스트 성향’이 의심된다는 게 집단 ‘탈덕’(팬덤 탈퇴)의 이유였다.

팬클럽 안팎에서 이 남성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책 한 권으로 개인의 사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적 정치관(성별 등의 차이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다.

무서운 대목은 우리가 한 사람을 ‘불순분자’로 낙인찍는 방식이 지난 세기 동구권 못지않게 비합리적이고 잔인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즘만 그런가. 주류(라고 생각되는) 사회에 반하는 생각들은 토론이 아닌 혐오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나와 다른 생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본보기로 희생양을 만드는 세태는 특히 걱정스럽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말하기를 이런 사회에서는 모두가 본심을 가리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한다. 그 결과는 끝없는 피로와 불행이다.

천호성 기자 thousa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