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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6분 20초 연설, 침묵의 긴 여운

입력 | 2018-03-26 03:00:00


때로 침묵은 그 어떤 웅변보다 힘이 세다. 2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총기 규제 촉구 집회에 참가한 고3 여학생 에마 곤잘러스의 ‘6분 20초 연설’이 그랬다. 지난달 플로리다주 한 고교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생존자 에마는 침묵의 긴 여운으로 참가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날 에마는 흘러내리는 눈물과 힘겹게 싸우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AR-15가 난사된 6분 20초 이후, 내 친구 캐런은 다시는 내게 피아노 연습에 대해 불평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앨런은 다시는 동생과 함께 등교할 수 없을 겁니다. 올리버는 다시는 샘이나 딜런과 농구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 “크리스 힉슨도 다시는, 루크 호이어도 다시는…”이라며 희생자 17명의 이름을 차례차례 호명하더니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눈물만 훔치며 연단에 서있는 에마의 침묵에 참가자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그는 잠시 뒤 알람 소리에 말문을 다시 열더니 “당신의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호소로 짧은 연설을 마무리했다. 명연설로 유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11년 5월 요란한 이벤트 대신 침묵으로 미국인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9·11테러 현장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는 2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추모식을 마친 뒤 방송 카메라를 배제한 채 유족들과 만나 위로를 전했다.

▷미국 사회에서는 담벼락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던 총기 규제 강화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날 하루만 해도 생존 학생들이 주도한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이란 이름의 집회가 미 전역 800여 곳에서 열렸다. 주최 측 집계로는 워싱턴 집회에만 80여만 명이 운집했다. USA투데이는 이 추산이 맞는다면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라고 보도했다. 평범한 여고생 에마는 총기 규제의 절박성을 전달하는 데 있어선 말보다 침묵이 더 효과적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입만 열면 ‘막말 대잔치’를 일삼는 이 땅의 정치인들, 웅변보다 더 귀한 침묵의 가치를 알아야 국민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언제쯤 깨달을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